아버지의 勸酒, 엄마의 뽀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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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호 35면

마흔 넘은 아들이 현관 문을 열면 아직도 엄마는 “아이구, 내 새끼, 어서 와~ 고생 많았네, 우리 장남~”하며 목을 끌어안고 볼에 입을 맞춘다. 나는 쑥스러운 척 목을 세우며 “어허~ 참, 아버지는?”하며 딴청을 피운다. 안방 문을 열면 돋보기를 끼고 바둑 책을 보던 아버지가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나오신다. 우리 집 3남매와 손자들의 사진으로 가득 찬 거실에서 큰절을 드리고 나면 아버지는 요즘 나온 내 작품의 평이며 사업 관계 일들을 시시콜콜히 묻고 들으신다.

On Sunday 기획칼럼 ‘당신이 행복입니다’

한 시간쯤 장남의 근황 브리핑이 끝나면 엄마는 친척들 소식을 전해주고 자신의 문학 동인지에 실린 시조를 펼쳐 보여주신다. 역시 엄마의 글 솜씨는 좋다. 몇 자 안 되는 글 속에 어딘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결혼한 동생들 역시 집안 행사 때문에 함께했다. 여동생 남편은 나처럼 영화감독이고 막내는 부산지검 검사다. 그간의 소식을 주고받다 내가 담배를 피러 슬쩍 작은방으로 가면 막내가 따라 들어온다. “뚱땡이, 아직 담배 안 끊고 뭐 하노? 아토오~”하더니 주먹을 소림사 승려처럼 만들어 내 턱과 명치 등을 노리며 초등학교 때나 하던 무술 동작을 해댄다. 나는 얼른 담배를 끄고 학권과 사권 등으로 대항한다.

저녁 식사 시간. 아버지께선 요즘 건강 때문에 술을 많이 못 드신다. 그 한을, 두 아들에게 최대한 많은 술을 먹이면서 푸신다. “야! 젊은 놈들이 뭐 하니? 어서 서로 한 잔 더 따라 주라우!” 결국 두 아들은 주거니 받거니 얼큰하게 취해 아버지의 추억 속 인물과 사건에 대한 감회를 경청한다. 그러다 우리도 한몫 끼어 20~30년 전 가족 에피소드를 꺼내곤 하는데, 가끔씩 여동생의 입에서는 울컥하는 말투가 터져 나온다. 부모님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았던 장남과 유독 공부를 잘했던 막내 남동생 사이에 끼어 자라며 받았던 설움과 울분이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다. 반 농담 삼아 ‘그때 왜 나한테만 그랬는지 당장 밝히라’며 도끼눈을 뜬다. 그러면 엄마와 두 아들은 마치 청문회에 선 것처럼 “기억에 없다. 오해다. 나는 몰랐던 일”이라며 서로 발뺌한다.

다음 날 아침 밥상. 이제 주변에서 채집한 유머와 실화들을 서로 펼쳐놓을 차례다. 아버지는 노인병원과 기원으로부터…. 엄마는 학부생으로 다니는 대학과 각종 모임들(제일 바빴을 때는 월 27개 모임에 참석했고 그중 절반 정도의 회장을 맡았다)로부터…. 여동생과 나는 연예계의 숨은 사건들, 막내는 법조계의 황당한 사건과 기가 찬 인생 스토리들을 말한다. 우리 가족은 거의 배틀(battle) 수준으로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직접 겪거나 본 장면을 얘기할 때는 이야기 속 주인공의 목소리는 물론 몸동작까지 흉내 내 스토리를 최대한 입체화시킨다. 우리 식구의 다른 사람 흉내 내기는 거의 예술 수준이다. 막 웃다 보면 눈물이 나고 쓰러질 때도 있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삼남매가 현관 문을 나서면 아버지는 벌써 섭섭한 표정이고 엄마는 다시 자식들의 목을 잡고 볼에 입을 맞춘다. 자식들 역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버지, 어머니 건강하세요.’ 내게 진정으로 행복을 주는 것은 우리 식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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