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로 맞추자] 한승수 전외무·김영희 대기자 대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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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새 밀레니엄을 맞아 통일에의 기대와 열망이 그 어느 때 보다 높다.반목과 갈등의 시대를 뒤로 하고 진정한 평화와 화합의 시대를 맞았으면 하는 것이 새천년 새아침 모두의 바람이다.한승주(韓昇洲·고려대 일민연구원 원장)전외무장관과 김영희(金永熙)본사 대기자의 대담을 통해 변화하는 세계정세속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이르는 지혜를 모아 본다.

▶김영희=지난해 12월 러시아 옐친 대통령과 장쩌민(江澤民)주석은 ‘미국의 독주를 견제해야 한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한 바 있습니다.중·러 양국이 새 세계질서 구축을 주도해온 미국 중심의 단극(單極)체제를 견제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한승주=미국이 세계적 차원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일한 나라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중·러 양국의 제휴가능성이 일단 희박한 것으로 보이지만 설사 그렇더라도 미국의 세계적 영향력이나 위치를 견제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김=중국은 군사력이 막강하고 2030년경에는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입니다.‘글로벌 파워’가 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힘에 덧붙여 큰 담론을 뒷받침하는 이념과 이상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는 과거에 비해 오히려 한계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한=미국은 자유주의·인권 같은 개념을 형식 논리에서뿐 아니라 실제로 구현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고 국내 정치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반면에 중국은 전세계에 비전을 제시할 청사진이 없고 의욕도 없어 보입니다.오히려 실용노선으로 내실을 기해 ‘다른 강대국의 영향을 받지 않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보입니다.

▶김=일본에서는 보통국가,즉 ‘보통의 강대국가’로 가야 된다는 지적이 많이 나오고 있고 보수진영의 요구가 거셉니다.그러나 이에 대한 경계심도 있기 때문에 일본이 금세기초 국가진로 결정에 어려움을 겪을 것 같습니다.

▶한=일본은 세계체제에 평화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의도가 있으면서도 강대국이 되겠다는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독일보다 더 우려되는 부분은 일본이 군국주의로 변한다기 보다는 ‘보통국가가 아닌 상태’가 오래 유지된데 대한 반작용입니다.일본이 국제사회에 점진적으로 ‘보통국가’대열에 들어서는 과정에서 갑작스런 변화가 오지않게 해야 한다고 봅니다.

▶김=한반도에 초점을 맞춰보면 평화와 통일의 과제가 있는데 단기적으로는 양자가 상충할 수도 있습니다.다만 주변 4강과의 관계를 조망해 보면 평화유지에 큰 걸림돌은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한국에서는 통일과 평화가 상충된다면 우선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이뤄져 있습니다.주변국들도 한반도에서 평화가 깨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우리 정부는 한국 입장이 미국·일본의 정책에 반영되도록 하는 동시에 중·러 양국이 북한의 군사력 증강에 도움을 주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김=북한이 과감한 개혁·개방을 꺼리는 이유는 역시 체제 위기감입니다.페리보고서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북한(North Korea as it is)’이라고 적시,협상대상이 현재의 북한임을 명시했는데 이 정도로 체제 안전보장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한=안전보장을 명문화한다고 해서 한·미 양국의 정책이 바뀐다는 의미는 아닙니다.양국 정책이 북한을 공격한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문제는 주한미군이나 한·미 군사훈련 부분입니다.주한미군이 실제로 남북간의 완충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북한이 생각할 수도 있고,또 평화와 전쟁억지에 기여한다는 전제가 변한 것은 아닙니다.그런 면에서 페리보고서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김=김영삼 정부의 초대 외무장관을 역임하셨는데 당시 대북정책과 지금의 대북정책이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한=북한을 포용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현 정부가 포용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한다는 점이 중요한 차이라고 봅니다.또 당시 ‘남북 관계개선이 북·미,북·일 관계개선에 우선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지금은 ‘북-미·일 관계개선이 결국에는 남북관계 개선에 도움이 된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김=소련등의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하고 서독이 동독을 흡수통일하는 상황을 보고 우리도 북한을 흡수통일할 수 있는게 아니냐는 환상이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을 규정한 게 아닙니까.

▶한=물론 북한의 ‘조기붕괴’ 혹은 ‘조기통일’의 기대가 지금보다 컸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책을 좌우하지는 않았습니다.다만 조기통일 가능성에 대한 대비는 필요하다는 것이 정부의 생각이었고 또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김=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평화우선’에 무게 중심이 있습니다.‘대북정책이 평화정책이며 통일은 유보한다’는 점을 보다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정부는 보수적 여론을 의식해 의도적으로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한=갑자기 ‘통일정책이 아니라 평화우선이다’라고 얘기한다고 해서 북한이 믿을 것도 아니고 통일을 강조한다고 해서 통일이 빨리 올 것 같지 않습니다.그런 점에서 현재 통일 혹은 평화를 강조하는 수위는 적정선이라고 봅니다.북한은 일단 포용정책을 비난하고는 있지만 포용정책 지속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더우기 북한은 과거와는 달리 ‘트로이의 목마’속에 적군이 들어 있다는 사실도 충분히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런 점에서 북한은 포용정책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의 도발이나 저항은 피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김=현 정부의 ‘햇볕정책’을 놓고 반론이 만만치 않습니다만 역시 대안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이 방향이 아니면 긴장고조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한=포용정책외의 대안이 없는 상황이라면 현 정책을 적극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다만 햇볕정책의 공과를 ‘당국간 대화’라는 잣대로 본다면 당분간 기대하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김=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 부시 주지사의 정책 보좌관들의 입장이 대단히 강경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미국에 공화당정권이 들어선다면 대북정책에도 영향을 미칠 것 같습니다.

▶한=미국에서 공화당이 집권하면 경제제재 완화 속도나 폭,경제지원 패키지 등 정책운용이 민주당과 조금 달라질 것입니다.대북정책 목표는 대량살상무기의 개발·수출을 방지하고 그 다음 평화적 체제로 변화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며,마지막으로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체제 구축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민주당정권이 계속 집권한다면 대량살상무기를 처리하면서 나머지 목표도 동시에 추진될 것이지만,공화당이 들어서면 대량살상무기 문제해결을 가장 우선할 것이고 그런 다음에 나머지 문제를 고려할 가능성이 큽니다.그러나 정책 기조는 크게 변하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김=그렇다면 북한은 미국 선거때까지 기다려 보자는 입장일 수도 있고 아니면 선거전에 해결할 것은 해결하자는 입장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한=미국 선거는 북·일관계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봅니다.북한은 공화당이 승리할 경우 대일관계 개선에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보고 선거전에 이를 서두를 가능성은 크다고 봅니다.

▶김=통일이 결국 준비된 상황에서만 온다는 독일의 경험을 곱씹을 필요가 있습니다.일희일비하지 말고 차분히 준비해 나간다면 평화와 통일의 날은 다가오리라고 봅니다.

정리=김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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