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대륙 유라시아] (1) 부활하는 비단길·초원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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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타슈켄트.알마티.모스크바.크라스노야르스크〓김석환 특파원]12월 26일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국경 부근의 침켄트. 물건을 가득 실은 컨테이너 운반 트럭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국경을 넘고 있다.

세관원들은 빠른 걸음으로 트럭들을 오가면서 서류와 물품을 확인하고 있다.

멀리 한국.중국 등지에서 생산된 상품들이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와 중국횡단철도(TCR)를 통해 내륙국가인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한국의 인천항이나 부산항에서 선적된 물건들은 중국의 롄윈강(蓮雲港)을 거쳐 TCR를 타면 5일만에 중앙아시아에 도착한다.

역시 러시아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와 보스토치니 등을 통해 선적돼 TSR를 탄 물건들도 1주일이면 중앙아시아에 도착한다.

고대에 몇달씩 걸리던 비단길과 초원길이 이렇게 단축된 형태로 되살아난 것이다.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 국가들이 독립을 선언한 뒤부터 TSR와 TCR를 통해 움직이는 물동량은 매년 두배 이상 증가하고 있다.

이 지역 최대 물류회사인 우즈베키스탄-영국 합작회사 '트란스콘티넨탈' 의 일리야 페고프 사장은 "자원의 개발, 물동량의 증가로 매년 매출액이 세배 넘게 늘고 있다" 고 말했다.

그는 TCR 및 TSR 외에도 유럽과 터키의 이스탄불,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드루주바를 잇는 환아시아(Trans Asia)철도, 타슈켄트-아슈하바트 - 바시(크라스노보드스크)- 바쿠-포티 - 바투미를 잇는 트란스코카서스 회랑 등이 이 지역 물류의 주요 통로라고 설명했다.

옛 실크로드 국가들이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이 지역에 새로운 활력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신(新)실크로드로 불리는 TRACECA(Transport Corridor Europe-Caucasus-Asia)프로젝트의 결과다.

32개국이 참여해 진행 중인 이 프로젝트는 유라시아 중심부를 물류와 광통신망의 통로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광통신망 실크로드로 불리는, 중국의 상하이(上海)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를 연결하는 총 연장 27만㎞의 광통신망 부설작업은 지난해 완료됐고 물류 현대화도 단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페고프 사장은 "현재 열리고 있는 전자상거래 시대에 값싸고 효율적인 물류통로의 확보는 필수적이다.

인터넷 시대, 유라시아 중심부는 동서양을 잇는 거대한 경제통로로 우뚝 서게 될 것" 이라고 강조했다.

게다가 이 지역은 단순한 연결통로에 그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시베리아 벌판에 묻힌 거대한 자원 때문이다.

서시베리아 평원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한티만시이스크.

몽골 북부 탄두누바에서 발원한 오브강과 카자흐스탄 북부 우랄산맥에서 시작한 이르티시강이 서시베리아 평원을 가로질러 달리다 북극해를 눈앞에 두고 서로 만나는 곳이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새벽.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극한의 땅에서 캐터필러가 달린 설상차(雪上車)의 엔진소리가 우렁차게 새벽을 깨운다.

시베리아 최고수준을 자랑하는 이 지역 유전으로 장비와 물품을 운반하는 차량들이다.

군데군데 미제 체로키, 일제 랜드크루저 등 고급 지프들이 보인다.

여기가 과연 천형의 땅이라는 시베리아의 한복판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다.

시립 미술관에는 17세기 러시아 화가들이 그린 성화들이 줄지어 걸려 있다.

서방으로 반출됐던 것을 주정부가 소더비나 크리스티 같은 해외의 미술품 경매장에서 무더기로 다시 사온 것이다.

눈덮인 대지 위로 최신식 주택들이 줄지어 서 있다.

주정부가 이주 노동자들에게 무료로 나눠준 집들이다.

중.고교에선 학생들이 펜티엄급 컴퓨터를 놓고 수업을 하고 있다.

의과대학과 사범대학까지 있다.

인구 3만5천명에 불과한 시베리아의 소도시가 수도인 모스크바보다 더욱 유복해 보인다.

유전에서 나온 풍부한 자금 때문이다.

시베리아의 지하자원은 러시아의 희망임을 보여주는 현장이다.

미국이 서부개척시대를 통해 국토를 개발하고 국부를 쌓았듯이 러시아는 시베리아 자원개발을 통해 새로운 대국 건설의 꿈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 부활하는 비단길.초원길은 과거와 달리 단순 중개무역지로서의 역할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세계 자원공급지역.투자지역으로서의 경제적인 측면과 다양한 국제세력과 고루 접하는 지정학적 전략지역이라는 측면을 함께 지니는 것이다.

2000년 4월엔 알마티에서 21세기 유라시아 중심부 국가들의 부활을 과시하는 제1차 지역 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이다.

막대한 자원과 에너지원에다 물류통로라는 전략적 위치를 배경으로 비상(飛翔)의 날갯짓을 하는 유라시아 중심부는 어쩌면 인류의 21세기 운명을 결정지을지도 모른다.

모스크바대 교수인 카렌 부루텐스는 "고대 훈족의 서진, 중세 때 몽골의 유럽 침공과 티무르제국의 건설 등 유라시아 중심부가 세계사를 좌우했던 역사적 사례들을 음미해야 할 때" 라고 지적했다.

유라시아 중심부에 대한 경제 투자 선점과 정치적 연결망 구성은 21세기 세계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설명이다.

미국과 러시아, 중국과 일본은 유라시아 중심부의 자원개발과 전략적.지정학적 변화의 흐름에 민감하다.

자칫 한눈을 팔다가 21세기 역사의 주도권을 다른 나라에 빼앗길지 모른다는 초조감도 강하다.

세계사적 변혁이 일고 있는 유라시아 중심부의 변화에 우리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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