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식량 자급의 꿈, 71년 '기적의 볍씨' 통일벼 낳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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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정희 대통령이 1971년 가을 충북 청원군에서 벼 베기 대회에 참석, 벼를 베고 있다. 작은 사진은 무기명 투표로 진행된 ‘통일쌀밥 시식회’에서 박 대통령이 서명한 밥맛 조사표. 통일벼 ‘맛’에 대한 시비를 단숨에 잠재웠다. [중앙포토]


1998년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 오창과학단지 건설 현장. 선사시대 유적을 발굴하던 이융조(선사문화연구원장) 충북대 교수는 탄화된 볍씨 59톨을 발견했다. 1만5000년 전 것으로 공인 받은 세계 최고(最古)의 볍씨다. 이 볍씨 59톨이 기원전 2000년께 중국을 거쳐 들어왔을 것이라는 벼의 한반도 재배 기원설을 흔들어놓았다. 이융조 원장은 “지난달 중국 후난(湖南)성 도현옥섬에서 출토된 볍씨가 1만4000여 년 전 것으로 판명됐다”며 “당시 한반도를 포함해 동북아 전체에서 벼농사가 광범위하게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한반도에는 청원군 소로리를 비롯해 경기도 여주(약 3000~2500년 전), 경기도 김포(약 4000~3000년 전), 평양 대동강 유역(약 3000~2500년 전), 충남 부여(약 2600년 전) 등에 탄화미 흔적이 남아 있다. 한민족이 본격적으로 벼농사를 지은 게 보수적으로 잡아도 3000년은 된다는 얘기다.

쌀이 이보다 전에 한반도에 들어와 있던 보리와 밀·기장·조·수수 등을 밀어내고 ‘식탁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우선 보관성을 내세운다. 수분 함량이 적고 외부가 단단한 껍질로 돼 있어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한 쌀은 언제나 굶주림과 싸우던 시절, 최고의 생존 수단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쌀은 맛이 담백하다. 떡과 술로 빚기도 좋다. 경제성도 우수하다. 쌀은 주요 작물 중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감자, 옥수수 다음으로 많다.

삼국시대를 지나면서 쌀은 서서히 우리 민족의 주식으로 등장한다. 백제와 신라에서 벼농사는 국가 차원에서 장려됐다. 통일신라에 이르러 쌀은 주곡 중 최고로 평가받는다. 한반도 북부는 조, 남부는 보리, 귀족은 쌀을 주로 먹었다. 이때부터 조세의 주요 대상도 쌀이 됐다. 고려 때 쌀은 화폐로도 쓰였다. 관리의 봉급이 쌀로 지급되기도 했다. 그만큼 쌀의 지위가 올라간 것이다. 조선시대에 오면서 전 국민의 주식이 쌀로 바뀌면서 말 그대로 밥상의 ‘주인’이 된다(국사편찬위원회,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일상생활 속에서도 쌀은 귀한 대접을 받았다. 햅쌀 항아리를 무명실로 묶어놓고 집을 지켜준다는 성주신(城主神)으로 모시는 것은 지금도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쌀을 밟으면 발이 비뚤어진다’ ‘키질을 할 때 쌀이 날리면 남편이 바람난다’ 같은 속담에서 보듯 쌀은 외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런 한국의 쌀 산업이 크게 위축된 것은 일제를 거치면서다. 일제는 일본의 공장 근로자에게 싼값에 쌀을 대주기 위해 조선의 쌀 생산을 늘리고자 했고, 그것이 산미증식계획으로 나타났다. 1914년부터 33년까지 일본으로 반출된 쌀이 약 8억7300만 석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생산된 쌀의 30%가 넘는다(고바야가와 규로, 『조선농업발달사』). 심지어 31년 일제는 조선의 쌀 생산량 158억7300만 석 가운데 902만 석(57%)을 자국으로 실어 날랐다. 이후 광복의 혼란, 6·25전쟁을 겪으면서 쌀 산업은 더욱 피폐해졌다.

한국이 쌀 자급을 이룬 것은 75년에 와서다. 본격적으로 벼농사를 지은 지 3000년이 지나서다. 이전에는 쌀 생산량이 턱없이 부족해 죽을 쑤어 먹거나 고구마·감자 등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그것도 힘들 때는 풀 뿌리나 나무 껍질로 보릿고개를 넘기기도 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식량 자급이 가장 먼저 풀어야 할 과제였다.

그는 다수확 신품종 개발에 관심이 많았는데, 중앙정보부가 이집트에서 들여온 볍씨에 자신의 이름 마지막 자를 따서 ‘희농(熙農)1호’라고 이름 짓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보릿고개를 넘길 효자”라고 자랑했지만 희농1호는 우리 토양에 맞지 않아 금세 사라졌다. 이후 박 대통령은 어떤 상품에도 자신의 이름을 달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진짜 ‘기적의 볍씨’가 나온 것은 71년이다. 서울대 허문회 교수가 일본·대만 벼를 교배해 만든 통일벼 ‘IR667’이 그 주인공이었다. 보통 벼는 이삭당 낱알이 80~90개였지만 통일벼는 120~130개나 됐다. 당시 상황을 논픽션으로 기록한 『라이스 워』(이완주)에는 “석 섬 나던 논에서 통일벼는 닷 섬이 났다”고 적고 있다. 생산량이 40%나 늘어난 것이다. 키가 작고 줄기가 단단해 잘 쓰러지지도 않았다. 덕분에 쌀 자급 달성(76년), 쌀 막걸리 탄생(77년), 대북 쌀 지원(77년) 등이 가능했다. 지난 7월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이 국가 연구개발 50년 10대 성과 사례를 발표할 때 ‘통일벼 개발’은 단연 첫째로 꼽혔다.

다만 푸석푸석한 맛이 흠이었다. 통일벼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차진 맛이 덜했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통일밥상 시식회’에서 참석해 이런 맛 시비를 잠재웠다. 색깔도 밥맛도 좋다며 ‘박정희’라고 서명해버린 것. 그 다음부터 아무도 통일벼의 밥맛에 대해 시비하는 사람이 없었다. 통일벼는 주곡 자급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고 90년대 들어 사라졌다.

그전까지 모자란 게 문제였다면 이번엔 남는 게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쌀 소비량이 크게 준 게 문제였다. 없어서 못 먹던 귀하신 몸이 불과 20여 년에 ‘찬밥’ 신세가 된 것이다. 소비 증가를 위해 쌀국수·쌀라면·쌀맥주 등 쌀 가공식품 개발에 나서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시장 변화도 꽤 있었다. 세계무역기구(WTO) 쌀 협상 비준안이 통과되면서 수입쌀이 다시 식탁에 오르게 됐다. 92년 대선 당시 김영삼 후보는 “대통령직을 걸고 쌀 시장 개방만은 막겠다”고 했으나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이후 정부는 100조원 규모의 농촌·농업 발전계획을 내놓았지만 농업 경쟁력은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2009년 현재 한국의 벼 재배 면적은 92만400여㏊. 지난해보다 1.2% 줄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쌀 생산 예상량은 468만t가량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484만t)보다 적지만 평년작(457만t)보다 늘어난 것이다. 연간 식량용으로 약 370만t을 소비하는 것을 감안하면 소비량의 두 달 반 분량이 재고로 남을 전망이다. 지난해 40㎏ 기준 5만1000∼5만2000원 하던 추곡수매가는 올해 4만5000원 이하로 뚝 떨어졌다. 이른바 ‘풍년의 역설’이다.

이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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