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수출 세계1위 도약 중국패션이 잠을 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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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베이징(北京)아시안게임이 열린 90년 9월. 당국의 눈을 피해 중국의 사회상도 취재하고 싶었다.

생김새가 비슷하니 별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딜 가도 외국인임을 금세 알아차렸다.

옷차림 때문이었다.

남루하고 단색 일색인 중국인들과는 확연히 구별됐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엔 출근 때마다 애를 먹는다.

사무실이 있는 외국인 전용 거주지역을 들어가기 위해 무장경찰에게 외국인 기자증을 매번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생김새가 비슷하면 더 이상 옷차림만으로 외국인을 알아보기 어렵게 된 것이다.

10년전 만해도 중국의 패션은 '2종3색(二種三色)' 으로 통했다.

군복과 인민복의 두가지에 색깔은 언제나 회색이나 남색, 아니면 흑색 등 3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개혁개방과 함께 중국의 패션도 잠에서 깨어났다.

80년대 들어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趙紫陽) 등 중국의 지도자들이 양복을 입으며 인민복 일색에 파문을 던진 것이다.

특히 후야오방의 부인 리자오(李昭)는 방직업 분야에서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중국인들의 패션감각에 불을 지폈다.

무엇보다 양복은 사치스럽고 세탁하기 불편하며 따뜻하지도 않다던 비난을 잠재웠다.

중국 최초의 모델회사인 신쓰루(新絲路)가 탄생한 것도 이 무렵인 84년이다.

상하이(上海)방직공장 근로자들 중에서 선발한 모델이 첫 선을 보이며 '패션은 자본주의의 대표적 정신오염 작태' 란 세간의 따가운 시선을 일축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중국의 패션은 얼마나 변한 것일까.

프랑스 패션협회 자크 무클리에 회장은 92년 중국을 방문해 중국의 패션이 서구에 1백년이나 뒤졌다고 혀를 찼다.

그러나 94년 두번째 방중시엔 50년, 세번째인 96년엔 20년으로 격차가 줄었다며 놀라워 했다.

베이징의 중심가 둥단(東單)거리. 피에르 카르댕 등 세계 유명업체의 의류를 파는 상점이 60개나 몰려 첨단 패션을 추구하는 중국의 신흥 부유층들을 손짓하고 있다.

파리에서 유행중인 옷은 베이징으로, 도쿄(東京)에서 인기있는 패션은 상하이.광저우(廣州)로 별다른 시차없이 수입된다고 신쓰루의 이사 장레이(張雷)는 설명한다.

이 때문에 78년 한푼도 안됐던 외제 옷 수입이 97년 10억달러로 치솟았다.

중국 자체의 의류산업 발전도 눈부시다.

78년 7억달러어치의 의류를 수출했던 중국은 97년 3백17억달러어치를 수출하는 등 95년 이후 3년째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이젠 저가에서 고가로 의류 수출 패턴을 바꿔 수출 의류의 30%가 고가라는 게 중국 의류를 유럽에 수출하는 업체인 '온엔온' 의 한국인 대표 선우환(鮮于煥)씨 말이다.

진리라이(金利來)나 사사(杉杉)등 중국의 유명 의류 회사들은 이제 수십만달러의 연봉을 주고 외국 디자이너들을 초빙, 중국 특유의 의류 브랜드 구축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난 4일. 베이징에선 제20회 포드 슈퍼모델 대회가 열렸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대회로 평가받는 포드 슈퍼모델 대회가 아시아에서 열리긴 이번이 처음이다.

'중국의 패션〓세계화' 를 노린 중국의 야심이 담긴 대회였다.

대회의 주제는 '동방의 얼굴을 찾아서' .93년 천쥐안훙(陳娟紅), 96년 셰둥눠(謝東娜), 98년 웨메이(岳梅)등 국제적 모델을 잇따라 배출한 중국이 21세기 세계 패션 장악을 위해 첫 걸음을 뗀 것이다.

무엇으로 세계를 제패할까. '중국특색' 으로 밀고 나가겠다는 게 한결같은 이야기다.

영화 007에 출연한 양쯔충(楊紫瓊)의 이브닝드레스를 디자인한 홍콩 정자오량(鄭兆良). 그의 작품엔 중국 고전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또 94년 홍콩에 '상하이 탕' 의류점을 연 뒤 성공의 여세를 몰아 뉴욕까지 진출한 데이비드 탕. 그의 작품엔 30년대 상하이의 퇴폐적 스타일과 60년대 사회주의의 희화적인 분위기가 어우러져 현대적인 중국의 멋이 되살아 난다는 평가다.

수천년 역사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개혁개방으로 두둑해진 중국인들의 지갑을 밑천으로 해 중국의 패션은 '싸구려' 에서 '세계의 멋' 을 향해 21세기로 성큼성큼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베이징〓유상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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