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 참회가 없는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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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바로 엊그제까지 법무부장관이고 검찰총수였던 김태정(金泰政)씨가 막무가내로 모르쇠로 일관하는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부도덕하고 부정직하며 무책임한 사회인가 하는 것을 새삼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장관이나 검찰총장이라면 공인(公人)으로서 거의 최고의 자리다.

그런 자리에 올랐던 사람이, 더구나 다른 자리도 아니고 바로 정의를 추구하고 수호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국가기구의 총책임자였던 사람이 지극히 간단한 증언을 끝내 거부해 진실을 오리무중에 빠뜨리고 옛 부하들을 '미칠 지경' 으로 만들고 있으니 어이가 없다.

하긴 부정직하고 무책임한 공인이 어디 김태정씨뿐이겠는가.

최규하(崔圭夏)씨는 대통령까지 지냈으면서도 당시 신군부의 집권과정에 관한 증언을 끝끝내 거부해 아직도 그 부분은 역사의 공백으로 남아 있다.

우리의 지난 반세기는 그야말로 격동이요, 격변이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비극과 범죄가 저질러졌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나게 마련이며 역사의 법정은 정의로운 심판을 내릴 것임을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사회의 경우에는 이런 믿음이 배반당하고 있다.

5년 전, 10년 전의 진실만이 아니라 반세기 전의 진실마저 암흑에 묻혀 있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진실을 밝힐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회피하고 침묵하고, 더 나아가선 진실을 숨기고 왜곡까지 하기 때문이다.

최규하씨도, 김태정씨도 이 부끄러운 전통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높은 공직에 올랐던 사람들의 부정직과 무책임만을 욕할 일도 아닌 것 같다.

지금도 국회 앞에서는 지난 권위주의시대에 혈육을 잃은 사람들이 그 진상이라도 밝혀달라는 시위와 농성을 1년이 넘게 계속하고 있다.

"1986년 6월 18일 아침, 자취방에서 시험 중이던 김성수는 서울대생을 찾는 전화를 받고 교련복 차림으로 나섰다. 그리고 3일 후, 아무런 연고도 없는 부산 송도 앞바다 방파제로부터 10m 떨어진 수심 17m 지점에서 스쿠버다이버에 의해 발견됐다. 시신은 세개의 시멘트덩이에 묶여 있었는데, 결국 '성적불량 비관자살' 로 보도됐다. "

의문사의 사연은 대개 이런 식이다.

누가 봐도 의문사이며 내용이 이 정도면 관련자와 목격자도 여럿일 것 같다.

그러나 아직까지 결정적 증언이나 제보를 해오는 사람이 없다.

그뿐인가.

의문사의 진실을 밝혀달라는 시위는 실은 지난 88년부터 시작됐지만 '문민정부' 는 귀머거리였고 '국민의 정부' 도 아직까지 요지부동이다.

우리가 지나간 일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것은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참혹했던 과거를 적절히 수습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그 과거를 기억해야만 한다. 용서가 필요하다면 용서해야 하지만 잊어서는 안된다. 기억함으로써 재발을 막을 수 있다. 과거청산에 실패한 나라는 여러 세대에 걸쳐 그 후유증으로 고통받는다. " 이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넬슨 만델라가 한 말이다.

최근의 옷 로비 사건 청문회와 검찰수사는 우리 사회의 정직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었다.

1차전에서는 여자들이 거짓말 경연대회를 벌이더니 2차전에서 남자들이 질세라 거짓말 경연대회를 벌였다.

대질신문을 해도 딱 잡아떼는 강심장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도덕적 눈금이 어느 선에 있는가를 웅변해주는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 데 동.서양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서양이 우리 사회와 좀 다른 점은 고백과 참회의 전통과 문화가 형성돼 있다는 점이다.

톨스토이나 성 어거스틴.루소의 참회록 등이 불후의 고전으로 전해져 오고 있는 것도 그런 전통과 문화 때문이다.

물론 그런 전통과 문화는 참회를 은총과 연결시키는 종교적 가르침 때문에 형성된 것이지만 기독교의 교세를 말하자면 우리 사회도 서구사회에 그리 뒤지지 않는다.

루소는 '잘못을 부끄러워 하라. 그러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뉘우치는 것이 부끄러워 뉘우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뉘우치려는 생각이 없고 뉘우치는 것에 높은 가치를 두지 않고 있다.

고백과 참회가 없는 사회에 거짓말이 횡행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거짓을 이 사회로부터 추방하려면 고백과 참회의 전통부터 마련해야 한다.

당연히 그것은 지도층부터 본을 보여야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엔 과거에 관해 입을 열어야 할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저마다 과거 자신의 위치에 걸맞게 진실고백에 나서야 한다.

그것이 이 거짓으로 가득 찬 사회를 정화하는 첫걸음이다

유승삼 중앙M&B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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