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더더기 없는 전개, 설득력 있는 안중근 만들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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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호 05면

안중근을 소재로 한 뮤지컬 ‘영웅’이 지난달 26일 개막했다. 100년 전 바로 이날, 안중근은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했다. 개막일을 기념일에 맞추는 등 제작사는 사회적인 기념 분위기를 활용한 ‘시(時)테크’ 전략을 구사했는데, 결과는 괜찮았다. 개막 이튿날 극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는 만원 사례. 작품 완성도로 볼 때 장기 흥행 레퍼토리도 가능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정재왈의 극장 가는 길 - 뮤지컬 ‘영웅’

궁금했다. 이야기 전개상 당연히 클라이맥스가 될 하얼빈역 거사 장면을 ‘영웅’은 어떻게 형상화했을까. 2막7장 그 장면은 한껏 부푼 기대에 비해 싱겁다 할 정도로 냉정했다. “삐익” 기적 소리와 함께 기차가 역에 멈춘 순간, 양복 주머니에 ‘하얀 손수건’을 꽂은 이토가 내린다. 일장기를 들고 환호하는 수많은 인파 사이로 안중근이 등장한다. “탕, 탕, 탕!” 세 발의 총성에 쓰러지는 이토. 급격한 암전 뒤, 안중근의 외마디 절규가 허공을 가른다. “대한독립 만세!”

실재와 허구를 섞은 ‘영웅’은 한 인물에 초점을 맞춘 사극이다. 그런데 탄생에서 죽음까지, 구구절절 비범한 성장기와 장삼이사가 따를 수 없는 영웅적 행적으로 분칠한 여느 일대기와는 달랐다. 줄거리에 집중된 시기는 1909~1910년 사이 불과 2년으로 동지들과 거사를 모의하고, 실행하고, 장렬하게 최후를 맞는 순간까지다.

이게 ‘영웅’을 살렸다. 군더더기 없는 알맹이만 압축적으로 모은 스토리 라인에는 관객을 계몽하려는 ‘주입식 영웅관’이 없었다. 대신 고뇌와 결단으로 충만한 한 인간 삶의 찰나적인 순간을 잔잔히 ‘보여만’ 줌으로써 관객 스스로 가슴속, 생활 속 영웅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무릇 관객은 감정보다 이성으로 설득될 때 오랜 감흥을 간직하는 법. ‘영웅’이 그랬다.

이 점은, 피치 못하게 제작사 에이콤의 국민 뮤지컬 ‘명성황후’와 대비된다. ‘명성황후’가 민족주의를 거칠게 드러냈다면 ‘영웅’은 매우 보편적인 가치를 역설한다. 그건 ‘동양평화론’(2막9장)을 주창한 안중근의 사유에서도 기인하지만, 나는 그사이 완숙해진 연출가 윤호진의 사회적인 안목을 보여주는 증거로 보았다. 이런 면에서 ‘영웅’은 ‘명성황후’보다 훨씬 진화한 작품이며, 보다 보편적인 정서에 호소하려는 한국 창작뮤지컬의 성장을 웅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웅’과 ‘명성황후’의 연관성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드라마 구성상 두 작품은 절묘한 연결고리로 엮인다. 그 고리 역할이 ‘설희’다. 가상 인물인 설희는 명성황후의 곁을 지킨 마지막 궁녀로, 시해 참상을 목도한 뒤 애국 충정에 불타 게이샤로 잠입, 이토의 애첩이 된다. 나중에 안중근의 거사는 설희가 보낸 밀정으로 성사되는데, 하얼빈역 이토의 양복에 꽂힌 하얀 손수건도 그녀의 지략에서 나온 표지다.

이는 인과관계로 얽힌 역사의 수레바퀴를 강조한 허구적 장치인데, 설득력이 높았다. 명성황후의 한이 설희를 매개로 안중근에 의해 해원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만 게이샤로 변신해 이토의 곁에 가는 설희의 행로는 비약이 심해 수긍하기 어려웠다.
총 2막 20장으로 세분한 ‘영웅’ 이야기의 템포는 경쾌하고 빠르다. 박동우의 발랄한 무대디자인 덕에 ‘영웅’은 독특한 장면의 미장센으로 이뤄진 한 편의 영화가 됐다. ‘듣는 것’(노래)보다 ‘보는 효과’(무대디자인)가 승했다는 말이기도 한데, 이것은 신예 작곡가(오상준)의 신중함과 비교되는 관록의 결과다.

박씨는 협소한 무대를 보완하기 위해 좌우로 여닫는 막과 컴퓨터그래픽(CG) 영상을 풍성하게 활용해 입체감을 높였다. 이 가운데 여닫이막에 사실적인 블라디보스토크 시가지를 영상으로 투사, 긴박감을 살린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투장면(1막4장)은 압권이다.

또한 ‘영웅’에는 유머가 있다. 거사를 향한 숨막히는 긴장의 여정 속에 윤호진은 한껏 여유를 부린다. 안중근의 동지인 촌놈 출신 두 사내가 찰가구역에서 적장 이토를 기다리며 수작을 부리는 2막4장 ‘아리랑’ 장면은 가슴 찡한 웃음과 감동을 준다. 사실과 허구, 글(文)과 칼(武), 침략과 평화, 어둠과 밝음 등의 대비가 장면 곳곳에서 드러나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것도 ‘영웅’의 장점이다.

‘영웅’엔 긴 여운을 남기는 노래(음악)는 없다. 비록 넘치진 않았지만 가사의 전달에는 무리가 없을 정도로 부족하진 않았다. 화성의 풍부함을 보충할 라이브 연주였다면 이런 음악적인 약점도 보완됐을 텐데 그게 아쉽다. 안중근 역 정성화는 가식 없는 담백한 연기로 평범한 영웅을 조용히 각인시키는 데 일조했다. 12월 31일까지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를 거쳐 LG아트센터 기획운영부장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서울예술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공연예술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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