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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은 근대화 혁명이라고 국내학자들도 이젠 인정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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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렴씨는 좌골신경통 때문에 집에서도 지팡이를 짚는다. 그는 “박 대통령 기념관 걱정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질 못해 신경통이 도졌다”고 말했다. [김경빈 기자]

‘비서실장 9년3개월’은 전 세계 대통령제 국가에서 찾기 어려운 장수 기록이다. 대통령의 신임에 김정렴은 열정적인 보필과 철저한 자기 관리로 보답했다. 재임 중 그에겐 조그마한 잡음도, 부패도 없었다. 보필은 박 대통령 사후에도 계속됐다. 30년 동안 그는 공직도, 돈 버는 자리도 맡지 않았다. 지금 맡고 있는 박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직이 전부다. 그는 박 대통령의 업적과 인간적인 면, 그리고 한국의 경제개발사를 소개하는 책 6권을 내는 데 여생을 바쳤다.

지난 20일 김씨의 서울 청담동 자택. 거실엔 액자 2개가 놓여 있다. 박정희·육영수의 사진인데 부부가 서명해서 선물한 것이다. 김씨는 “나는 혁명 동지도 아닌데 대통령께서 ‘김정렴 동지’라고 쓰셨다”고 좋아했다.

-가장 충격적인 일은 아무래도 육 여사 피살 아닙니까.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여사님이 문세광의 총에 맞았습니다. 수술을 했지만 출혈이 심해 여사께서 운명하셨습니다. 주치의와 함께 제가 보고를 드리자 대통령께서는 둘째 딸 근령씨와 지만군을 껴안고 대성통곡을 하셨습니다. 그런 대통령의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김씨는 얼굴을 찌그러뜨리며 마구 눈물을 흘렸다. 그러곤 일어나 티슈박스를 가져왔다.)

-최근 ‘리서치 앤 리서치’ 조사에서 ‘나라 발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전직 대통령’으로 박정희가 압도적인 1위(75.6%)로 꼽혔습니다. 2위 김대중은 12.9%, 3위 노무현은 4.4%였고요. 다른 조사에서도 대개 그렇습니다. 이제는 평가가 제대로 되는 건가요.

“아직도 멀었어요. 서거 후 10년 정도는 격하가 심했습니다. 신군부 정권이 차별화를 시도하면서 3공 권력자들을 부정부패로 몰았습니다. 국민 사이에서도 독재만 부각됐고요. 오히려 외국에서 평가가 시작됐어요. 쿠데타에다 인권탄압 했다고 하는데 개도국 중에서 경제개발을 제일 잘했다고 하니 외국 학자들이 비결을 연구한 거지요. 세계은행을 중심으로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연구 결과가 이어졌어요. 그런 것에 영향을 받아 국내 연구도 시작되긴 했는데 10년밖에 안 됐어요. 그러니 박 대통령 평가는 뚝 떨어졌다가 이제 겨우 중간쯤 올라온 겁니다.”

-특히 노무현 정권 때 폄하가 심했지요.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을 지낸 이정우 교수는 “박정희가 밥을 많이 지어놓았다고 하지만 후임 대통령들은 장작이 모자라 밥 짓는 데 애를 먹었을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이백만 청와대 홍보수석은 “박 대통령이 고교 교장이라면 노 대통령은 대학총장”이라고 했습니다. ‘효자동 이발사’ ‘그때 그 사람들’ 같은 영화에선 박 대통령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기도 했지요.

“노무현 정권 주변에 있는 위원회·연구기관 사람들이 좌파 아닙니까. 그 사람들은 어떤 도그마에 빠져 있는 것 같아요.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독재를 했으니 연구할 가치가 없다’ 이런 생각 말이죠. 그런 좁은 생각에서 벗어나 공부를 크게 해야지요. 세계가 왜 박 대통령을 공부하겠습니까.”

-5·16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5·16 군사혁명은 근대화 혁명입니다. 단순히 권력을 잡기 위한 게 아니라 국가의 근대화를 위해서 혁명을 한 거란 애기죠. 좌파 교과서를 시정하기 위한 ‘교과서 포럼’에서 회원 모두가 5·16이 근대화 혁명이라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포럼이 쓴 고교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와 ‘한국 현대사’에 그렇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9년3개월간 비서실장으로 중용했던 김정렴씨를 주일대사로 보내면서 1979년 1월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김씨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중앙포토]

-‘박정희 근대화 혁명’은 민중에 의한 게 아니라 지도자에 의한 혁명, 즉 ‘위로부터의 혁명’이라는 평가가 있질 않습니까.

“트림버거(Ellen Kay Trimberger)라는 미국 학자가 1978년에 『위로부터의 혁명(Revolution from Above)』 이란 책을 썼습니다. 시민사회가 채 성숙되지 않아 민주적 토론을 통해 일을 진행시킬 여유가 없을 때 위로부터의 지도가 불가피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분석한 거지요. 그는 네 가지 혁명을 꼽았는데 일본의 메이지 천황, 터키의 케말 파샤, 이집트의 나세르, 페루의 벨라스코 장군이지요. 일본 도카이 대학의 하야시 교수가 91년 『박정희의 시대: 한국, 위로부터의 혁명 18년』이란 책을 내면서 박 대통령을 다섯 번째로 꼽았습니다.”

-박 대통령을 생각하면 어떤 모습이 가장 많이 떠오릅니까.

“항상 표정이 별로 없으세요. 웃음이나 미소도, 찡그리거나 화내는 것도 거의 없어요. 제가 일을 잘했다고 생각했을 때도 수고했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알았어’라고만 했죠. 그런 대통령이 기분이 좋아 많이 웃을 때가 있어요. 특보들하고 막걸리를 마실 때 새마을운동으로 여기저기가 이렇고 저렇게 좋아졌다는 얘길 들으면 아주 좋아하셨죠.”

-박 대통령은 검소하고 청렴했다고 하지요. 대표적으로 어떤 게 기억납니까.

“그때는 쌀을 아끼느라 혼식과 분식을 장려하지 않았습니까. 박 대통령은 아침밥엔 보리를 30% 섞었고 점심엔 칼국수를 드셨습니다. 저와 부속실장 등 본관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칼국수를 먹었습니다. 저는 점심때도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집무실 책상에서 점심을 때웠지요. 오후 서너 시쯤 되면 배가 고파 참느라고 혼났어요. 비서들은 누룽지라도 찾으러 식당을 기웃거렸지요.”

-칼국수를 드실 때 공깃밥이라도 한 그릇 같이 드시지 그랬습니까.

“아니 쌀을 아끼려고 국수를 먹는데 어떻게 밥을 먹나요. 그리고 대통령께서 그렇게 하시질 않는데 제가 어떻게….”

-차지철 경호실장은 점심 때 스테이크를 즐겨 먹었다면서요.

“그렇다고 하더군요. 차 실장이 자기 식당에 나를 여러 번 초대했지만 나는 한 번도 가질 않았어요.”

-개발 독재가 불가피했다고 하지만 권력이 남용된 것도 많지 않습니까.

“유신은 취지도 좋고 경제적으로 성공도 했지만 운용을 잘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대통령의 긴급조치라는 제도를 도입했는데 이 긴급조치를 발동할 필요가 없도록 사전에 잘 대처했어야 했는데 긴급조치만 믿고 안이하게 한 게 있어요. 불필요하게 권력이 쓰인 부분이 있는 거지요.”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허진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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