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5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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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58. 한일협정 마무리

65년 6월 20일 김포공항 입구. 나와 연하구 외무부 아주국장이 타고 있던 자동차가 시위대의 집중적인 달걀 세례를 받았다.

나는 반쯤 열린 창문으로 날아온 달걀에 맞아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옆 자리에 있던 延국장은 마치 총 세례를 받은듯 좌석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내가 "총알이 아니고 달걀이야" 하며 그의 옆구리를 툭 치자 다소 겸연쩍은 표정으로 일어나 앉더니 달걀로 범벅이 된 내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일단 공항 청사에는 도착했지만 야당 의원들이 점거하고 있어 곧바로 활주로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도 수백명의 시위대가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시위대는 나를 보자 "제2의 이완용(李完用), 매국노 이동원은 자폭하라!" 며 고함을 질러댔다. 내가 어쩌다 '나라를 팔아먹은 자' 와 동렬에 놓이게 됐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

순간 시위대가 경찰 저지선을 뚫고 막 나오려던 참이었다. 우리 일행은 허겁지겁 비행기 트랩을 뛰어 올라가야 했다. 역사적인 한.일 협정 서명을 위해 출국하는 마당에 환송은 못 받을망정 마치 쫓겨가는 꼴이 돼 버렸으니 착잡한 심정 가눌 길이 없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쯤 물수건으로 내 옷을 닦으려 하자 이병호(李炳豪.남방개발 부회장)비서관이 얼른 물수건을 빼앗는 것이었다.

"장관님, 우리가 한.일협상 때문에 얼마나 곤경에 처해 있는지를 일본에도 보여줘야 합니다." 들어보니 그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오후 5시쯤 하네다(羽田) 공항에 도착했다.

영접 나온 시나 외상은 계란세례로 엉망이 된 나를 보더니 아무 말도 못한채 그저 내 손만 꼭 붙잡는 것이었다.

속으로 '안 됐다' 는 생각에서였으리라. 그래서 그런지 시나 외상은 이날 저녁 도쿄시내 긴자(銀座)의 한 요정에서 협상타결을 축하하는 주연(酒宴)을 성대하게 열어 줬다.

술잔을 돌리며 한참 분위기가 익어갈 무렵 스즈키 젠코(鈴木善幸.전총리)우정상(郵政相)이 웃 옷을 벗은채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나타나 주위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러더니 반주에 맞춰가며 두 손을 머리 위로 휘돌리는 전통 일본 춤을 추는데 그 모습이 흡사 꽃을 찾아 노니는 나비와도 같았다. 일본 대신들조차 그의 춤 솜씨에 넋을 잃을 정도였다.

65년 6월 22일 오후 5시 일본수상 관저. 역사상 처음으로 이곳에서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삼엄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관저 주위에서는 수많은 시위대가 한.일협정 조인 반대 구호를 외쳐댔고, 그런 가운데 마침내 협정 조인식이 열렸다.

이날 양측은 기본조약을 비롯, 어업.문화.법적지위.청구권 및 경제협력 협정과 부속 의정서 등 모두 일곱 건의 문서에 서명했다.

조인식에 걸린 시간은 모두 40분. 그토록 끌어 왔던 한.일 국교정상화가 마무리 되는 순간이었다.

다음날 귀국해 청와대로 갔더니 朴대통령은 내가 가져온 서류를 한참이나 쳐다 보며 "이거 가져오는데 몇년 걸렸나?" 고 물었다.

그러자 延국장이 "자유당 시절부터 햇수로 15년" 이라고 대답하자 대통령은 "앞으로 1백50년이건 1천5백년이건 잘 돼야 할 텐데..." 하며 감개무량한 표정이었다.

한.일 협정 비준안은 우여곡절 끝에 8월 14일 여당만 참석한 가운데 국회에서 전격 통과됐다.

그후 넉 달만인 12월 18일 오전 10시35분 중앙청 회의실에서 양국간 비준서가 교환됐다. 험난했던 한.일 국교정상화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국가간 협상은 국력에 좌우되는 것이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특히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은 국민소득 1백 달러에도 못 미치던 가난한 나라가 경제대국을 상대로 한 판 승부를 벌인 '다윗과 골리앗' 의 싸움이었다.

그것이 최상의 선택이었는지는 사가(史家)들이 판단할 몫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당시 냉혹한 국제현실을 맨 몸으로 거스르며 협상에 최선을 다 했다는 점만은 분명히 말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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