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터뷰] 연말 세번째 시집 출간 앞둔 박노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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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나 이제 조용히 가슴 치며/다시 사랑을 배워야 하네/뜨거운 마주봄이 아니어도/한 길에 선 일치가 아니어도/서로 속 아픈 차이를 품고/다시 강물을 이루어야 하네//건널 수 없는 산과 산이 무릎을 맞대며/텅빈 들판을 푸르른 여울로 휘감아 흐르듯이//아 이 아득한 천지간에/먼 듯 하나인 듯/새벽 강물로 다시 흐르는 두 사람의 모습은/얼마나 큰 슬픔인가 아름다움인가" (시 '새벽 강에서' 후반부)

시인은 우리에게 첫 마음을 돌려준다. 많이 배우고 못 배우고, 부자고 가난하고, 선하고 악하고 이래 저래 살아 이제 각기 제 갈길을 가는 우리들에게 세상과 처음 만났을 때의 순정을 떨리는 감동으로 돌려주는게 시다.

박노해(41)씨가 꼭 그런 시인으로 우리에게 돌아온다. '노동의 새벽' , '참된 시작' 에 이어 제3시집을 올 연말에 내기 위해 마지막 원고작업을 하고 있다.

이번 시집의 대주제는 위 신작시 '새벽 강에서' 보이듯 첫 마음의 순정성으로 서로간의 차이 보듬기일 듯하다.

"태어나 어릴 때 망망대해를 향해 물길을 떠난 곳, 모천(母川)으로 기필코 돌아오고야 마는 연어떼를 보셨지요. 이 바다 저 바다 온 세상 풍파 다 겪어내며 성장하다 폭포 거스르며 앝은 모래내에 살갖 다 찢기면서도 필사적으로 모천으로 돌아와 산란하고 편안하게 죽어가는 연어의 그 첫 마음이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

80년대 소외된 현장에서의 노동과 인간적인 노동의 댓가를 받으려는 노동운동, 그에따른 수배와 90년대 7년간의 투옥생활. 박씨는 그렇게 낮고 춥고 어두운 진보의 바다를 헤엄치다 지난해 말 우리에게로 돌아왔다.

감옥에서의 폭넓은 독서와 깊이 있는 반성, 혹은 반추로 나름의 새 생각을 가지고 출소한 박씨는 전국의 현장과 현자들을 만나며 그 생각들을 다시 가다듬었다.

그렇게 해 본지에 '박노해의 희망찾기' 를 연재한 후 지난 9월 중순 펴낸 산문집 '오늘은 다르게' (해냄刊)이 베스트셀러 상위에 계속 오르며 많은 독자들의 세기말 새 길 찾기를 돕고 있다.

그리고 하루 30건 이상의 강연 요청과 원고 청탁, 매스컴 출연 요청 심지어 광고 모델 제안 등이 쇄도하고 있다.

이런 호응만 있는게 아니라 비판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지금도 현장에서 묵묵히 실천하며 나름대로 변화를 모색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박씨가 위선적인, 거창한 이야기들로 80년대 투쟁의 성과를 왜곡하며 독식하고 있다는 지식인들의 곱지않은 시선이 그것이다.

"지식인들의 차가운 눈초리, 저를 '왕따' 시키려는 위협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들은 제가 80년대의 상징으로만 박제화되기를 바라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대한 사회과학주의적 착오입니다. 이제 달라진 대중의 바다, 그 현장 한가운데 몸 담가야합니다. 이론이나 글을 읽고 쓴 글, 텍스트의 텍스트를 하고 있는 것이 문제 입니다. "

배운 지식, 독서와 이론에만 기대 세상과 삶을 재단하고 비판하는 것이 진보적 지식인들의 문제라는 것이다. 박씨는 특히 진보적 지식인들의 귀족주의.엄숙주의를 경계한다. 자신들만이 지성을 독점해야한다는 태도, 그렇게해서 패쇄되고 기득권 유지에 급급하는 지성은 이제 사라져야한다는 것이다.

"80년대 운동이 계급의 평등을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 존재의 평등 운동으로 나가야합니다. 너와 나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똑같이 소중한 개인의 가치와 자유를 지켜주어야합니다. 나와 60억 인류와의 관계를 조망하며 '큰 개인' 이자 '지구적 개인' 으로 거듭나는 생활 속의 진보운동이 필요합니다. 과거 대립적 평등이념도 '나눔과 공존' 이라는 새로운 실천논리로 재정립돼야 합니다. 저는 지금이야말로 그런 운동.혁명을 할 때라며 첫 마음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

80, 90년대 진보적 지성.운동계를 돌아보고 새로운 세기의 그것을 전망한 박씨의 생각들은 이번 달 말에 나올 '현대사상' 겨울호에 권두대담으로 실리게 된다.

5시간에 걸쳐 박씨와 대담한 '현대사상' 주간 김성기(한일장신대교수)씨는 "기존의 지식인들이 진단하고 던지지 못한 반성과 전망의 진솔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박씨가 내놓았다" 며 박씨의 시인적 순수 통찰력과 결부된 치밀한 '현장적 지성' 을 높이 샀다.

'

"진정한 강함은/닫힌 강함이 아니다//단순한 강함/비판적 강함/한바탕 강함이 아니다(중략)진정한 강함은 비록 작아도 여려도/생을 두고 끝까지 정진하는 것이다/흔들려도 끝까지 걸어가는 것이다" (시 '진정한 강함' 중)다시 시집을 내며 박씨는 시인의 순수한 첫 마음으로 다음 세기로 넘어가려 하고 있는 것이다. 여리면서도 강하게. '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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