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의 컬처코드 (29) 동성애 코드의 진화, 그 아찔한 속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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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여성 5인조 아이돌 그룹 f(x)의 엠버(오른쪽). 보이시한 외모와 매력으로 10대 소녀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한 여자와 두 남자가 주인공인 멜로다. 그러나 두 남자는 연적이 아니다. 그렇다면?

현재 개봉 중인 김아론 감독의 ‘헬로우 마이 러브’는 10년간 사귄 남자친구가 유학 중 커밍아웃하고 남자애인과 함께 귀국하면서 시작한다. 어쩐지 무겁고 칙칙할 것 같다고? 천만에. 영화는 경쾌 발랄하게 게이 커플과 한 여자의 삼각관계를 그린다.

이번 부산영화제 기간 중 축약본을 선보인 김조광수 감독의 ‘친구 사이?’도 예쁘고 상큼한 게이 청년들의 연애담이다. 본인이 게이 감독으로서 전작 ‘소년, 소년을 만나다’에 이어 ‘꽃미남 게이 로맨스’물을 계속 선보이고 있다. “우리의 동성애 영화는 너무 무겁고 진지했다. 동성간의 사랑도 가볍고 예쁘게 그리고 싶다”는 게 그의 말이다.

#역시 상영 중인 스페인 영화 ‘산타렐라 패밀리’는 동성애자의 가족 구성문제를 다뤄 관심을 모았다. 원래 이성애자로 살다가 커밍아웃한 꽃중년 게이에게 과거 헤어진 자식들이 찾아오고, 꽃미남 게이 연인과 함께 새로운 가족을 꾸린다는 얘기다. 동성결혼이 합헌인 스페인이 배경이지만, 코믹하고 자연스러운 터치로 동성애와 대안가족 문제를 풀어가는 데 국내 관객들도 환호했다. 영화의 수입사 이미지팩토리의 박상백 대표는 “유럽적인 현실을 배경으로 했지만, 동성애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감이나 혐오를 넘어서 성적 소수자와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는 관객평이 많았다”고 말했다.

#사실 동성애 소재에 대한 우리 대중문화 속 표현은 관대해진 지 오래다. 흥행코드로까지 부상했다. 남장여자가 나온 ‘커피 프린스 1호점’, 꽃미남 게이들의 육체적 매력을 전시한 ‘앤티크’, 동성애를 넘어 양성애를 끌어들인 ‘쌍화점’까지 나왔다. 남성 아이돌 그룹에 열광하는 10~20대 여성들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팬픽(팬들이 쓰는 소설)’은 아이돌 그룹 멤버들간의 동성애를 로맨틱하거나, 에로틱하게 묘사했다. 아예 ‘완벽한 남자에게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이동통신사 광고 카피까지 등장했다.

최근 주목할 경향은 같은 동성애 중에서도 게이문화보다 하위문화로 취급 받는 여성동성애 문화의 대두다. 팬픽 시장에서는 소녀시대·원더걸스·카라 등 여성 아이돌 그룹 멤버들끼리 사랑에 빠지는 여자동성애 팬픽이 인기를 끌고 있다(‘야오이’물이라 불리는 남성 동성애물에 비견해 ‘백합’물이라고 불린다). 과거 여성 동성애가, 이성애자 남성들의 일탈적인 성적 환상으로 소비됐던 것과 달리, 이들 백합물의 주 생산자 겸 소비자가 10~20대 이성애자 여성이라는 점이 이채롭다.

아예 레즈비언 코드를 겨냥한 여성 아이돌 그룹 멤버도 등장했다. 걸그룹 ‘f(x)’의 남장여자 래퍼 엠버가 대표적이다. 중국계 미국인인 엠버는 중성적이거나 보이쉬한 외모를 넘어 진짜 남자 같은 옷차림과 행동으로, 10대 소녀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같은 남장여자지만 윤은혜(‘커피프린스1호점’)나 박신혜(‘미남이시네요’)가 한눈에 여자임을 숨기지 못했다면, 엠버는 사전정보 없이는 100% 남자처럼 보인다. 또 다른 남장여자들이 결국 남자와 ‘이성애’에 빠지는 것과 달리, 엠버는 소녀팬들의 여자동성애적 환상을 겨냥하는 것도 차이다. 성의 고정관념 파괴를 넘어선 일종의 ‘분절화’, 그 속도감에 정신이 아찔해진다.

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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