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산책] 파격 'TV실험극' 인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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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낯 모르는 성인 남녀 9명이 외딴 곳에서 1백일을 함께 지낸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공연한 상상은 일단 유보해두자.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TV로 지켜볼 수 있으니까. 미국 할리우드 영화 '트루먼쇼'이야기가 아니다. 영국작가 조지 오웰의 소설'동물농장'이야기도 아니다. 그야말로 영화나 소설같은 이야기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네덜란드 케이블TV채널인 베로니카의 화제작 '빅 브라더 쇼(Big Brother Show)'가 그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네덜란드 푸로듀서 폴 뢰머의 상상력에는 '빅 브라더'의 원조(元祖)인오웰도 무덤속에서 무릎을 칠 것 같다. 뢰머는 3천명의 지원자들 가운데 엄선한 여자 4명과 남자 5명을 암스테르담근교의 외딴 집에 감금(?)했다. 2000년을 1백일 가량 앞둔 9월17일이었다.

그들의 직업은 교사.자동차 외판원.미용사.신발가게 판매원.실업자 등으로 다양하다. 20세에서 45세까지 연령 편차도 크다. 네 아이의 어머니에서 새파란 아가씨와 총각.기혼남성까지 골고루 섞였다.

이들의 행동과 대화 내용은 집안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남김없이 촬영되고 녹음된다. 욕실.화장실.침실도 예외가 아니다. 밤에는 적외선 카메라가 어둠을 뚫고 위력을 발휘한다.

하루 24시간 촬영한 필름을 30분 분량으로 편집, 매일 저녁 8시 황금시간대에 방영한다. 인터넷(bigbrother.veronica.nl)을 통해 24시간 생중계도 한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일일연속극' 인 셈이다.

시청자들의 역할도 그저 바라만 보는 관찰자에 그치지 않는다. 시청자들은 보름에 한번씩 전화투표를 통해 '부적격자' 를 한 명씩 걸러낸다. 시청자들이 프로그램 진행에 직접 참여하는 만큼 시청률도 폭발적이다.

12월 31일 밤 최후의 생존자 한 명이 결정되면 그에게는 25만길더(1억5천만원)가 상금으로 주어진다. 참가자들 가운데 이미 여자 3명과 남자 2명이 탈락했다.

이중 사빈(26.여)은 여성 시청자들 사이에 가장 인기있는 남성 참가자인 바르트(23)와 이불 속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적외선 카메라에 잡힌 게 화근이 됐다. 여성 시청자들의 질투심이 발동한 것이다. 마르틴(32)의 지나치게 수줍은 성격은 시청자들의 짜증을 자아냈다.

인터넷에는 참가자별 팬클럽도 생겨났다. 요즘 시청자들의 관심은 갑자기 뜨거워지고 있는 카린(39)과 연하의 남성 모리스(25)의 관계에 쏠려 있다.

이 프로그램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시각도 있다. 네덜란드 심리학회는 성명을 통해 '빅 브라더 쇼' 의 무책임성과 위험성.비윤리성을 비난했다.

"저열한 관음증(觀淫症)을 상업화한 이 프로그램을 끝장내기 위해 특공대를 투입해 '인질' 을 구출해내겠다" 고 벼르는 과격단체도 생겨났다. 방송사측은 출연자들이 머무르는 집의 경비를 강화해야 했다.

일부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빅 브라더 쇼' 는 매일 저녁 네덜란드인들의 시선을 붙들어두는 '국민적 현상' 이 됐다.

"사생활의 개념은 이미 환상이 됐다. " 프로듀서 뢰머의 말이다. 너무나 투명해 사생활이 존재할 수 없다는 얘기일까. 국제투명성기구(TI)의 평가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여덟번째로 '투명' 한 나라다.

하지만 모든 것을 투명한 탓으로 돌리기에는 씁쓸한 구석이 많다. 밀폐되고 은밀한 공간에서도 광장 한복판에 선 것처럼 위선적으로 처신하며 살든지, '빅 브라더' 의 눈길에 모든 걸 내맡긴 채 그저 체념하며 살든지 두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는 메시지가 짙게 풍기기 때문이다.

TV에는 가학적 '몰래 카메라' 가 판치고 실생활에는 불법 도.감청이 난무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비춰볼때 더욱 그렇다.

배명복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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