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기 '보통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조희룡 '호산외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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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수월(水月)에 둔 내 뜻을 저바리지 않는다면, 달이 어찌 물을 가려 비추리오." 수월도인(水月道人)이란 호를 쓰던 임희지(林熙之)는 변변한 마당이 없는 집에 살면서도 그 마당에 손바닥만한 연못을 팠다.

연못에 끌어댈 샘물도 없어 쌀뜨물을 이웃에서 모아 부었으니 그 희뿌연 물에서 무슨 운치가 나오겠는가. 그래도 해질녘이면 술잔을 들고 연못가에 앉아 뜨물에 비칠 달을 기다리며 위와 같은 노래를 불렀다니 정말 보통 풍류객이 아니다.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학문과 예술을 폭넓게 이어 받은 인물로 많은 서화작품뿐 아니라 적지 않은 저술을 남겼다. 그중 호산외기(壺山外記)는 같은 시대, 또는 조금 앞선 시대를 산 사람들의 전기(傳記)를 모은 책이다.

사서(史書)에 다뤄질 '중요인물' 이 아닌 '보통사람' 들의 산 모습을 전한다고 해서 '외기' 라 한 것이다. '보통사람' 이라 해서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아니다.

온 세상이 부러워하는 출세를 한 사람들이 아니지만 그 뜻을 아는 이라면 옷깃을 여밀 만한 뛰어난 경지를 이룬 40여인의 모습을 그린 책이다.

그려진 모습 중에는 덕행(德行)도 있고 기행(奇行)도 있다. 등장인물은 문인, 서화가에서 의원(醫員), 기객(棋客)까지 다양하지만, 각자 나름대로 뛰어난 기개(氣槪)를 보여주는 인물들이라는 것이 한 가지 공통점이다.

저자가 전범으로 삼은 것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열전(列傳)이다. 그중에서도 시정잡배로 몰릴 만한 인물들의 생동하는 모습을 담은 유협전(遊俠傳), 화식전(貨殖傳)에 저자는 뜻을 두었다.

자신이 사마천과 같은 대인거필(大人巨筆)이 못되므로 혹 그런 사람이 나중에 참고하도록 자료를 남긴다고 겸손을 떨지만, 능력은 몰라도 뜻에는 당당한 자부심을 가졌음을 그 필치에서 느낄 수 있다.

열린 마음으로 19세기 전반기를 산 한 사람의 눈을 통해 그 시대 사상사와 사회사에 풍부한 시각을 얻을 수 있는 자료일 뿐 아니라, 한국인의 해학(諧謔)전통을 깊이 맛볼 수 있는 읽을거리다.

실시학사(實是學舍)역주 '조희룡전집' (한길아트.12만원)6권 중에 끼어서 나왔지만, 이 책은 전집과 별도로 일반독자들에게 널리 전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김기협 문화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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