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 도청공방의 목적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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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야당은 정부.여당을 향해 불법 감청의 의혹이 짙다고 몰아댔고, 정부.여당은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뛴 지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그러나 논의는 그런 수준에서 한 발짝도 진전이 안되고 있다. 도청논란의 목표는 선량한 국민들이 도.감청 노이로제에서 벗어나 마음놓고 자유롭게 전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일 텐데도 그저 멱살잡이만 계속될 뿐이다.

정부로서는 야당의 주장을 부분적으로 인정만 해도 정권 전체 도덕성에 큰 상처가 날 판이니 설사 잘못이 있었더라도 수긍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야당도 그런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런 공방은 끌면 끌수록 정부.여당 손해이지 야당에 흠 될 것은 적으니까 계속 물고늘어지려 할 것이다.

그러나 제3자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논란과 공방은 이제 그만하면 됐다.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험난한 세월을 살아온 국민들이 감(感)이 없을 리 없다. 더 논란을 벌이지 않더라도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정치공세인지 판단들을 하고 있을 것이다.

또 어차피 이번 도.감청 논란은 문제의 통신비밀보호법의 개정논의로 이어지게 돼 있으니까 그 논의를 살펴보느라면 정부.여당의 주장이 옳았는지, 야당의 주장이 옳았는지가 좀 더 명확히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만약 이번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에서 정부.여당이 야당에 못지 않게 국민의 기본권 보호에 철저한 자세를 보여준다면 이제까지의 야당 주장은 정치공세의 측면이 강한 것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법개정에서도 시늉만 할 뿐 국민의 기본권 보호에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이제까지의 야당 주장을 사실이라고 인식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만큼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이나 전기통신사업법의 많은 규정들은 국민의 기본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수사기관의 수사편의를 위한 것이라고 봐도 지나칠 것이 없다.

통신비밀보호법이 아니라 통신비밀취득법이라는 비아냥은 그래서 나온다. 감청대상 범죄가 1백50개나 되고 48시간 이내에는 사실상 무제한 감청이 가능하고 통신정보쯤이야 수사기관이 협조요청만 하면 마음대로 얻을 수 있는 게 현실이니 통신비밀취득법이라 한다 해서 지나치다 할 게 없을 것이다.

흔히 언론이 양비론(兩非論)을 자주 편다고 비난하는데 이번 도.감청 공방은 결과적으로 양시론(兩是論)이 됐으면 좋겠다.

'국민의 정부에선 불법 도.감청이 없었다' 는 주장이 옳다면 비로소 우리는 국민의 기본권을 충실히 지켜주는 정부를 가져 좋은 것이고, 야당에 대해서는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한 공을 높이 평가해줘야 할 것이다.

도.감청의 폐해에 대해서는 여야의 구별 없이 공감대가 형성돼 있어 낙관적인 전망도 해보게 된다. 가령 조순형(趙舜衡)의원은 개인의 통신비밀을 영장 없이 단지 수사기관의 서면요구만으로 제공해주는 것은 위헌의 소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 같은 여당의원인 유재건(柳在乾)의원은 감청을 했을 경우에는 본인에게 통지해주고 불법감청이 유일한 증거일 때는 증거능력이 소멸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야가 이런 인식에 기초한다면 통신비밀보호법을 민주적으로 개정하는 데 큰 난관은 없을 것이다. 柳의원의 견해는 지난 15일 변재승(邊在承)법원행정처장이 국회법사위에서 한 답변 내용과도 거의 일치한다.

당시 邊행정처장은 "불법감청을 한 다음 기소하지 않거나 기소하더라도 불법감청으로 수집한 녹음자료 등을 증거로 제출하지 않은 채 수사목적으로만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고 말해 수사기관의 불법감청을 숱하게 감지해 왔음을 내비치는 발언도 한 바 있다.

그러나 도.감청 문제가 법만으로 해결될 수는 없다. 지난해 법원의 감청영장 발부율은 98.9%, 올 상반기에도 97.9%에 달했다. 말하자면 청구하는 대로 허가해준 셈이다.

책임을 법원에 돌릴 일만은 아니지만 만약 법원만이라도 국민의 기본권 보호에 엄격했더라면 수사기관의 법남용은 크게 줄어들 수 있었을 것이다.

지난달 서울지법 산하 영장전담판사 25명은 간담회를 갖고 압수수색.통신감청영장을 엄격히 심사하며 사후 허가를 받지 않은 긴급감청자료는 재판에서 증거능력을 배제한다고 결의했다. 이런 원칙의 시행이 서울지법뿐 아니라 전체 법원에 확대적용돼야 한다.

여야는 통신비밀보호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총론에는 합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총론에서는 그럴듯하게 해놓고 각론에서는 총론의 합의내용을 사실상 뒤엎는 각론의 반민주성과 법의 하극상은 후진국 법체계의 특징이다.

이번에만은 각론에서도 총론의 민주적 의도가 관철되기를 바란다.

유승삼 중앙M&B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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