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 감방에 TV 넣어 내 증언 보게 하라"

19년 전 자신을 성폭행했던 범인 검거 소식에 “나는 이제 피해자가 아니라 승리자”라고 말하고 있는 제니퍼 슈잇.(사진 왼쪽). 사진 오른쪽은 미국 주간지 ‘피플’에 성인이 된 자신의 얼굴을 공개한 제이시 두가드. [AP=연합뉴스]

미국에서도 아동 성폭행 사건으로 떠들썩하다. 18년간 감금과 성폭행에 시달렸던 제이시 두가드(29)가 집으로 돌아오고, 19년 전 성폭행범을 밝혀낸 제니퍼 슈잇(27)이 자신의 사진 공개를 결정하면서다. 영구 미제 사건으로 끝날 뻔했던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배경에는 아동 성폭행을 엄단하는 법 제도와 피해 여성의 용기가 있다.
두가드 사건의 범인인 필립 가리도(58)는 1970년대 어린이 납치와 여성 성폭행 혐의로 50년 형을 받고 11년간 수형 생활을 했던 전과자였다. 석방 후 그는 성폭행 전과 때문에 경찰 감시를 받아왔고, 결국 두가드가 낳은 두 딸을 데리고 외출했다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제니퍼 슈잇을 성폭행한 데니스 얼 브래드퍼드(40)의 범죄가 밝혀진 것도 경찰과 미 연방수사국(FBI)의 끊임없는 추적 덕택이었다. FBI는 19년 전 범행 현장에서 확보한 티셔츠와 피해자의 잠옷에서 DNA를 채취해 보관하다가, 첨단 장비를 갖추게 되자 다시 사건을 추적했다. 결국 이것이 96년 유사 범행을 저질러 3년간 복역한 브래드퍼드의 DNA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슈잇 사건은 미 경찰과 FBI의 노력에다 피해자의 강인한 의지가 있었기에 해결 가능했다. 19년 전 있었던 사건을 낱낱이 공개한 그는 1년 반 동안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성폭행 경험을 공개하고 비슷한 고통을 겪는 여성들과 대화하며 범인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지난달에는 8살이던 자신을 성폭행하고 살해하려 했던 범인을 잡아달라고 CNN 등 유력 언론을 통해 호소했다. 그녀는 “이것은 더 이상 나만의 일이 아니다. 세상에 너무나 많은 소녀들이 강간당하고 상처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되돌려 줄 차례다. 내가 불행한 기억에서 나를 분리시키려고 했다면 당국의 조사가 여기까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전사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범인을 색출한 뒤 그는 기자회견에서 “이제 나는 희생자가 아니라 승리자”라고 말했다.
엘리자베스 스마트(21)가 10월 1일 성폭력 피해 경험을 법정에서 공개한 것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심신 미약’을 이유로 범인이 법정 출두를 거부하자, 사법당국에 범인을 TV가 있는 방에 넣고 자신의 증언을 듣도록 조치해 줄 것을 요구했다. 2002년 자신의 집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납치돼 1년 가까이 성 노예로 살았던 그는 법정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당시 상황을 자세히 증언했다. 나무에 묶여 하루에 서너 차례씩 성폭행을 당했고, 나중엔 길에 버려졌다는 내용이었다. 범인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고 마치 왕처럼 행동했다고 증언했다. 두 사람은 모두 범죄 전문가가 돼 성폭행 피해 여성들을 돕는 데 나서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美 아동성폭행 피해자들, 용기 있는 '커밍아웃'잇따라

18년 동안 감금 생활을 하고 두 딸을 낳았던 두가드 역시 성인이 된 자신의 얼굴을 14일 주간지 ‘피플’에 공개했다. 어머니와 여동생, 두 딸과 함께 지내고 있는 두가드는 “집에 돌아오게 돼 행복하다”고 말했다. 엘리자베스 스마트는 언론을 통해 두가드에게 조언을 보냈다. “끔찍한 과거를 극복하고, 그 일이 당신의 나머지 인생을 삼켜버리지 않도록 하세요. 뒤를 돌아보지 마세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돕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동 성폭행 피해자가 이렇게 자신의 상처를 공개하는 게 한국에서도 가능할까. 박소영 세명대 교수는 “미국에서는 피해자를 피해자로 인정하지만 한국은 피해자에게도 뭔가 잘못이 있을 것이라는 혐의를 둔다”며 “피해자들이 진정으로 과거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꾸려갈 수 있도록 그들의 고통을 공감하고 애정과 응원을 보내줄 수 있는 문화가 조성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