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 북한TV와 '강철서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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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북한 영화 중 '이름없는 영웅들' 이라는 20부 대작이 있다. 6.25전쟁 중 암약했던 북한 첩보요원들의 활동상을 그린 영화다.

휴전협정이 진행 중이면서도 양측의 공방전이 치열할 무렵, 주인공 '유림' 이 영국 신문 종군기자로 위장해 서울로 밀파된다.

한.미연합군의 대공세가 시작되는 날짜와 장소를 알아내기 위한 치열한 첩보전이 남과 북, 미군 방첩기관간의 쫓고 쫓기는 긴박한 사건전개로 펼쳐진다.

물론 북한쪽 시각이지만 민족과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이름없는 영웅들의 고난과 희생이 보는 이로 하여금 피를 끓게 한다.

여기에 미군방첩대 소속의 옛 애인 '순희' 와 '유림' 과의 이루지 못하는 애절한 사랑이 미군의 만행에 의한 남북 비극탓이라는 결론을 자연스레 도출해낸다.

나는 이 영화를 지난 방북기간 틈만 나면 비디오로 봤다. 그만큼 재미있게 만든 영화다. 재미 속에는 독소도 있다.

'해방전쟁' 에 대한 당위성과 '미제' 에 대한 끝없는 분노를 부추기며 민족과 혁명사상을 고취한다.

북한 영화 속엔 이런 메시지가 어떤 형태로든 담겨 있다. '우리는 묘향산에서 만났다' 는 러브 스토리 영화 속에도 묘향산 암벽에 '수령님' 교시를 새기는 석공을 혁명전사로 극화시킨다. 베스트 셀러 소설 '청춘송가' 도 도시 사무직을 선호하는 요즘 젊은이들에 대한 경고와 공장노동자의 영웅적 업적을 찬양하고 있다. 어린이용 TV 만화 속에도 북한식 교양과 사상을 고창(高唱)하는 메시지는 빠지지 않는다.

북한의 출판물과 TV.영화는 체제유지를 위한 선전.선동의 가장 강력한 도구다. 사전 기획과 사후 검열이 철저하다. 계획된 메시지와 준비된 소리가 어떤 형태로든 담겨 있다. 그 메시지를 얼마나 간접적이고 세련되게 포장했느냐는 차이일 뿐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누구나 아는 북한 상식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널리 알려진 북한 상식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 독소의 늪에 너무나 쉽게 빠져들고 있음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80년대부터 이 땅에 주사파 바람을 몰고 왔던 두 명의 운동권 '대부' 가 최근 간첩혐의로 구속됐다가 풀려났다. 두 사람 모두 최고 학부를 나온 엘리트들이다.

주체사상 관련 책을 탐독하면서 북한을 지상낙원으로 알게 되고 '강철서신' 을 띄워 주사파들을 선동, 조직하면서 반잠수정을 타고 월북해 훈장을 받고 자금을 얻어 간첩활동까지 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주체사상에 빠져들었다가 전향하는 과정을 보면 단순하기 짝이 없다. 전향 이유 중 이런 대목이 나온다. 북한 시골을 지나면서 허름한 농가 건축물을 보고 저것이 공장이냐고 묻는다.

안내원은 농민들이 사는 살림집이라고 답한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정권이 어떻게 저런 남루한 집에 인민을 살릴 수 있을까 하는 회의를 품는다.

주체사상탑에 오르다가 길을 잘못 들자 "야 이 새끼야 어디를 올라와" 라는 관리인의 욕설을 듣고 인민을 위한다는 정권이 인민들에게 어떤 대접을 하는지 실감하면서 자신이 책을 통해 배우고 익힌 낙원에 실망하고 전향을 결심케 됐다는 것이다.

제한된 지면에 충분한 사연을 쓸 겨를이 없었고 전향 이유를 단순화시킬 필요성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점을 탓하고 싶지 않다. 어째서 외곬의 한눈으로 북한에 쉽게 빠져들었다가 북한에 발을 딛고서야 북의 실상을 알게 되는가 하는 탄식이다.

90년대 들어 북한 경제가 파탄이 나고 거듭되는 흉작으로 아사자가 속출했다는 사실은 상식에 속한다. 공산주의체제 아래의 관료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보다 더 경직되고 부패했다는 사실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한쪽 눈을 감고 책을 보고 한쪽 날개로만 날려 했기 때문에 균형감각을 잃고 상식을 외면한 것이다.

지금 북한 위송방송 시청 허용 여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막을 법이 없고 허용해도 영향을 받지 않을 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됐다는 게 허용론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우리 현실은 주사파들의 반성문에서 보듯 그렇게 성숙되질 못했다고 본다. 북한TV를 허용할 경우 북의 방송정책은 대남선전공세에 맞춰질 것이다. 만화에도 영화에도 그들의 메시지는 끊임없이 담겨질 것이다. 이를 우리 어린이와 젊은이가 독소는 보지 못한 채 재미에만 빠져들 때 외눈박이 외팔이 북한TV 세대를 양산할 수 있다.

북한을 보되 바로 봐야 한다. TV를 보되 재미와 독소를 가려 볼 판단능력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북한 방송은 허용하되 단계적으로, 제한적으로 해야 한다. 우선 정부기관과 관련학계나 연구단체에 한해 허용해야 한다.

남북 방송교류란 양측이 합의하고 인정하는 절차를 거쳐 쌍방적으로 이뤄져야 효과를 거둔다.

권영민 논설위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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