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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볼만한 '편지영화'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4면

"가을엔 편지를 쓰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쌓이던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의 전령사인양 이맘때면 방송 음악프로에 단골로 오르내리는 '가을편지'란 노래. 편안한 멜로디를 타고 묻어나는 정취가 누구라도 사랑하고픈 마음을 느끼게 한다.

'가을과 편지'. 낙엽이 내려앉은 벤치에 앉아 잠시 사색에 잡겨 뭔가 끄적이고 싶을 때 우리는 '편지'를 떠올린다. 잊고 지낸 친구, 열렬히 사랑했던 애인, 고향에 계신 부모님, 혹은 앞의 노랫말처럼 아무에게나도 좋았다. 요즘 이메일 등 전자통신이 발달한 시대라고 해도 정성스레 깨알같이 밖힌 그 육필(肉筆)의 온기를 어찌 따를 수 있을까.

그래선지 영화는 아직도 그 아름다운 흔적들을 찾아 노스탤지어의 고향으로 가끔 우리를 인도할 때가 있다. 비록 감정의 분출이 과도해 보이긴해도 진한 울림이 배어있는 연서(戀書)야말로 가을편지 중 단연 으뜸이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어느날 내가 중심을 잃고 넘어졌을 때 무릎이 벗겨져 가슴을 쓸진 않았는지요/당신을 보면 사랑이 샘솟고 당신을 그리면 난 불타오른답니다. 온몸의 근육은 미동을 멈추고 나뭇잎과 공기는 숨소질 죽이죠. "

'첨밀밀' 의 천커신(陳可辛) 감독이 연출한 영화 '러브레터' (23일 개봉)의 실제 편지내용이다. 이혼녀인 책방주인 헬렌은 우연히 소파 사이에 끼어있던 낡은 편지 한 장을 발견하고 삽시간에 연정에 휩싸인다.

마을사람들은 이 편지를 돌려읽으며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즐거운 착각' 에 산다.

편지를 쓴 이가 누구인들 어쩌랴. 편지 한장으로 서로 제 짝을 찾아 다시 생의 활력을 되찾았으면 그만이다.

얼마전 개봉됐던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로맨틱 멜로 '병속에 든 편지' 는 간절함에서 이보다 한술 더 뜬다.

"난 길을 잃은 것 같소, 나침반 없는 배처럼/당신은 나의 별이자 내 유일한 안식처요. " 죽은 아내를 못잊어 하는 주인공 홀아비는 상실감을 이렇게 달랜다.

한국영화라고 예외일 리 없다.

2년전 인기를 끈 박신양.최진실 주연의 '편지' 는 그 부류의 대표작. 아내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난 남자는 그녀에게 황동규의 시 '즐거운 편지' 가 적힌 편지 한장을 남긴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 오랫동안 전해오는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

이런 류의 감상적 편지공세는 이밖에도 많다. 로버트 테일러.비비안 리 주연의 고전 '애수' 도 그렇거니와 한국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화이트 발렌타인' 도 그에 못지 않다.

세태를 반영하듯 편지를 주고 받은 방식도 변해 인터넷이 동원되는 '유브 갓 메일' '접속' 등도 희비극의 단면을 그린 영화로 꼽을 수 있겠다.

아울러 편지가 예술적 영감의 촉매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다.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집배원의 교감을 다룬 '일 포스티노' 와 '토탈 이클립스' , 다음달 개봉될 '레드 바이올린' 도 그런 경우다.

특히 '토탈 이클립스' 에서 19세기말 프랑스의 젊은 시인 베를렌느가 랭보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는 이처럼 강렬하다.

"위대한 영혼 내게 오소서, 이는 운명의 부르심이니. " 운명적 만남은 우연히 찾아 오는 법. 만약 이 가을 사랑하고픈 사람은 편지를 쓰라.

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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