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진정한 사과일까 고개 숙인 척 한 걸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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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담 수석대표인 김남식 통일부 교류협력국장이 14일 개성에서 열린 임진강 수해 방지 회담을 마친 후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에 도착해 북한 측과의 협의 내용에 대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파주=연합뉴스]

남북 관계의 돌발 악재 하나가 제거됐다. 지난달 6일 임진강 북측 수역 황강댐 무단 방류로 6명의 사망자를 낸 데 대해 북측이 14일 유감과 조의를 밝혔기 때문이다. 정부는 북한의 유감 표명을 수용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국가 간 외교 관례에서도 유감 표명은 사과로 간주된다”고 설명했다. 북한이 늦게나마 임진강 수해 방지 회담을 수용하고 사실상 사과와 함께 유족에 대한 조의를 표명한 점을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하겠다는 게 정부 안팎의 분위기다. 당초 북한은 사건 발생 하루 만인 지난달 7일 “수량 증가로 긴급 방류를 했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다. 하지만 통일부가 “책임 있는 당국의 충분한 설명과 사과를 요구한다”고 재차 압박하고, 수공(水攻) 의혹까지 제기되는 등 국민의 대북 여론이 악화되자 사건 발생 한 달여 만에 유감 표명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움직임은 큰 틀에서 남한과의 경색된 관계를 풀어야 한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판단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은 지난 8월 16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의 면담에 이은 특사 조문단 서울 파견(8월 21~23일)을 계기로 대남 유화 메시지를 보냈지만 정부의 반응은 냉담했다. 북한의 대화 제의가 진정성이 부족한 전술적 차원이란 게 정부 핵심 당국자들의 인식이다. 임진강 회담을 지켜본 당국자는 “북한이 대남 접근을 서두르는 건 남북 관계 복원 자체보다 원만한 북·미 대화를 위한 윤활제로 삼으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북한의 유감 표명에도 불구하고 임진강 무단 방류를 막을 재발 방지책 합의는 쉽지 않아 보인다. 북한은 14일 실무회담 대표로 민족경제협력연합회와 국토환경보호성 관계자를 내보냈다. 홍수예보체계 등 구체적 논의에 들어가려 하자 북측 대표단은 소극적 태도를 보이며 다음 일정도 잡지 않은 채 회담을 마쳤다. 한 당국자는 “임진강 댐을 관할하는 군부의 승인 없이는 논의 진전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남북 관계 진전을 위해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당장 16일 열릴 적십자 실무접촉에서 북한이 추가 이산상봉이나 납북자·국군포로 문제 등 남측이 제시할 부담스러운 의제에 어느 선까지 호응할지가 변수다.

조속한 금강산 관광 재개를 원하고 있는 북한으로선 관광 중단의 원인이 된 지난해 7월 관광객 피격 사망에 ‘사과’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재발방지책 마련 등 정부가 내걸고 있는 선결 조건에 대해서도 전향적 입장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5월 핵실험 감행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여전한 상황에서 북한에 막대한 달러(관광 대가)가 유입될 관광 재개를 정부는 마뜩지 않아 하고 있다. 남북 관계의 주도권을 남측에 넘긴 형국에서 이명박 정부를 압박할 뾰족한 카드가 없다는 점도 김 위원장을 고민스럽게 할 대목이다.

◆이번이 여덟 번째 유감 표명=당국 차원의 유감 표명은 김 위원장 집권 이후 네 번 있었다. 1996년 9월 동해 잠수함 침투사건 때 북한은 3개월 만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관영매체를 통해 밝혔다. 2002년 6월 서해교전과 지난해 금강산 관광객 사망 때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입장이 나왔다. 김일성 주석(94년 7월 사망)도 68년 1월 청와대 무장공비 침투 기도사건과 관련, 발생 4년 만인 72년 5월 방북한 이후락 정보부장에게 “대단히 미안한 사건이며 좌익 맹동분자들의 소행”이라고 말하는 등 네 차례 유감을 표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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