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28.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제12장 새로운 행상⑥

1860년에 있었던 북경조약으로 소련연방으로 귀속되기 전까지 이 땅은 중국령이었다. 옌지에서 버스로 달리면 두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이 지방에 옌볜(延邊)에 살고 있던 조선족이 이주하기 시작해서 1869년에 이르러서는 4천5백여명 이상의 한인들이 황무지를 일구며 살았다.

마침 포시에트 시가를 관통하고 있는 지신허(地新墟)라는 강이 있어 농수로를 만들고 황무지를 개간하는 데 좋은 입지조건이 돼 주었다.

당시 소련 연방은 기왕 포시에트 인근에 들어와 살고 있는 한인들을 소련연방의 국민으로 인정하여 인두세(人頭稅)를 영원히 면제해 주고 토지세(土地稅) 역시 향후 20년간이나 면제해주는 특전을 베풀어 그 땅이 다시 황무지로 변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스탈린 시대 중앙아시아 쪽으로의 강제이주 이후 포시에트의 농토는 다시 황폐화됐지만, 강제이주의 법령이 해제되고 난 후부터 다시 옛땅을 찾아온 한인들이 하나둘씩 포시에트로 찾아들어 러시아인들뿐이었던 땅에 얼마오쯔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얼마오쯔들은 안색이 질려 있는 승희에게 기회있을 때마다 겁먹지 말라고 다독거려 주었다.

포시에트는 도시라기보다는 한적한 시골이었다. 먼 구릉지 저쪽 멀리로 회색의 낡은 목조 가옥들이 바라보였다. 난전이 열리는 길이 목조 가옥들이 보이는 구릉지 쪽으로 연결돼 있었다.

어디선가 새소리조차 들려오는 낮 12시의 장시였다. 소문대로 난전을 펴고 있는 대부분의 행상들이 조선족 여자들이었다.

닭장을 노린 족제비가 개구멍으로 침입하듯 아무런 증명서도 없이 덜컥 러시아 땅에 들어온 것이었다.

승희는 비로소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행동을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다. 객기였다 해도 수준을 넘은 것이 분명했고, 만용이었다 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짓을 저질렀다는 후회가 뼛속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

햇살에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린 조선족 여인이 울타리에 기대어 차일을 친 난전 뒤에 웅크리고 앉았다.

아파트 당첨권을 얻어내려고 밤샘하는 무주택자들처럼 울타리를 의지하고 늘어 앉은 조선족 아낙네들과 자신의 입성을 조심스럽게 비교해 보았다.

옷은 옌지를 출발하기 전에 조선족 행상들과 비슷한 것으로 갈아 입었었다. 눈에 띌 만한 차이를 발견할 수 없는데도 모가지는 자신도 모르게 견골 속으로 자꾸만 기어들었다.

그것을 의식하면서 후회는 더욱 가슴속을 후비고 들었다. 자신은 한국인이란 사실이 그처럼 극명하게 가슴을 방망이질한 기억도 없었다.

하늘에서 밧줄이라도 내려오면 무작정 그 밧줄을 타고 허공으로 올라가고 싶었고, 갑자기 천지개벽이라도 돼 그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가당치도 않은 상상만이 지금의 순간들을 지탱해주는 유일한 위안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가슴은 조바심으로 뛰기 시작했다. 한철규를 떠난 것은 분명 자신의 투명한 의지였다.

그런데 안면도를 떠나 이 낯선 땅에 주책없이 뚝 떨어진 것은 의지라기보다

그 의지에 편승돼 무의미하게 저지른 만용이었다.

한철규와의 결별과 튼튼하게 연루된 일탈이었으면서도 그와는 전혀 무관한 행동이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한걸음 앞을 가늠할 수 없는 막연한 위기감,돈벌이를 생명과 같은 반열에 두어도 좋다는 황폐함이 언제 어디로부터 이토록 진솔하게 자신의 가슴을 차지해 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하물며 도대체 한 곳에 진득하니 머물 수 없는 바람난 여자라 할지라도 지금의 행동에 설득력을 얻을 수 없었다.

자신의 행동이 한철규를 떠난 것과 연루돼 있지 않기를 바랐고 또한 그러한 증거들이 가슴속에 잠재돼 있기를 바랐으나 그 또한 분명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녀는 일어서서 난전을 둘러보아야겠다고 자신을 추슬렀다. 그러나 이미 몸은 땅속으로 들어가 묻힌 것처럼 무거웠다.

그녀는 소스라치며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다시 구릉지 멀리 한가롭게 웅크린 목조주택으로 시선을 꽂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