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의식' 창간 11돌 행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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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한두 시간까지는 지루했다. 잡지나 책.영화에서 수없이 읽고 보아온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과연 또 보아야 하느냐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했다. 그러나 9시간 이상에 걸친 가감없는 증언들이 차츰 나를 빠져들게 하며 인간성과 그 것을 탐구하는 문학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었다. "

11~12일 1박2일간 강원도 원주 토지문화관에서 문인들은 9시간30짜리 영화 '쇼아 (Shoah)' 를 보았다.

그리고 밤새 토론도 벌였다.

계간문예지 '문학과의식' 이 창간 11주년 기념으로 마련한 이번 행사에는 소설가 박경리.전상국.오정희.김채원.이문열.정소성.박양호.정종명.유익서.정찬.안혜숙씨, 시인 서지월.김상미씨, 문학평론가 정현기.김화영.우찬제씨등 문인 30여명이 참석했다.

문인들의 세미나는 자유분방하다.

머리 싸매고 원고와 씨름해야하는 각자의 집필 공간에서 풀려나와 동료들과 함께 술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러나 이번 행사는 엄숙했다.

영화에 빨려들며 문인들로서 엄숙한 책무를 반추하는 모습들이 역력했다. '쇼아' 는 1985년 유대계 폴란드 감독 클로드 란츠만이 11년간 학살관련당사자들의 증언으로만 만든 영화다.

제목 '쇼아' 는 '이 지구상에 존재할수 있는 재앙 중 가장 큰 재앙' 을 나타내는 히브리어로 '홀로코스트' 같이 유대인 대학살을 뜻하는 보통 명사화된 말이다.

이 영화는 자료 화면이나 전문가의 코멘트를 철저하게 거부하고 오로지 증인들의 증언과 학살의 현재 장소만 보여준다.

란츠만 감독은 자료 화면을 '상상력 없는 이미지' 라며 증언자들의 증언, 지금 이곳에서 과거로의 여행을 통해 학살의 흔적만 보여주며 관객들의 지적.심리적 참여를 유도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인 증언자는 세 부류로 갈린다.

"아우슈비츠는 죽음의 컨베이어벨트였으며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학살은 점차 대량화.현대화돼갔다" 고 태연히 증언하는 수용소 하사관 출신.

"몇분 후면 처형될 아내와 딸을 가스실에서 만나 머리를 잘라주는 유대인 이발사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할수 있겠느냐" 며 울먹이는 유대인 생존자 이발사. 두시간후면 가스실에서 처형돼 소각로에서 한줌의 재로 변할 운명도 모른채 기차로 수용소로 들어가는 유태인들에게 웃으며 목잘리는 시늉을 했다는 폴란드 농민 등. 가해자.피해자.방관자들의 증언으로 관객들은 그 학살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접근해들어가게 한다.

국내 최초로 이 영화를 문인들에게 보여준 이상빈 (외국어대 외국문학연구소 초빙연구원) 씨는 "우리나라에도 그런 상처체험이 있는데 정리하지도 않은채 서둘러 다음 세기로 넘어가려는게 안타까워 여러 작가 앞에 이 작품을 소개한다" 고 밝혔다.

박경리씨는 "지금 한창 권희로씨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정신대.광주 문제등도 화해는 해야되겠지만 결코 잊지는 말아야된다" 고 했다.

"작가로서의 나 자신이 부끄럽다. 한없이 가벼워지는 우리 문학계는 반성해야된다. 아직 우리에게는 문학의 진지성을 위해 다가가야할 아픈 기억들이 너무 많지않은가" 라는 전상국씨의 말처럼 '쇼아' 는 우리 문인들의 문학 하는 자세를 다시한번 추스르게했다.

원주 =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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