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 대통령과 책과 지식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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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지난 8월 23일 열흘간의 여름휴가를 떠나면서 책 12권을 가져갔다.

책 목록도 학술서적에서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고 수준도 높았다.

극우파에 관한 책이 있는가 하면 가슴을 훈훈하게 하는 감동소설이 있고 '보비 케네디와 미국 귀족사회의 종언' 과 같은 책에다가 서스펜스 소설도 들어 있었다.

클린턴은 멀리건으로 악명높은 골프광이기도 하지만 젊은 시절부터 독서에도 골프에 못지 않은 열정과 높은 안목을 지녔다.

그래서 해마다 클린턴이 휴가때 읽을 도서목록을 발표하는 것은 백악관의 연례행사가 돼 왔고, 출판사나 저자들은 그 무렵이면 그 목록 발표를 마른 침을 삼키며 기다려 왔다.

미국에서도 역시 정치와 정치인은 비난과 비아냥, 무관심의 대상이긴 하다.

그렇지만 우리의 사정과 비교하면 한참이나 부러운 수준이다.

우리도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 지도자들의 휴가때 도서목록이 발표되고 출판사와 저자, 그리고 일반 독자들은 그 발표를 숨죽이며 기다리는 '풍습' 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일까.

그래도 책, 독서 이런 문제에 관한한 가장 모범적인 정치지도자는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일 것이다.

지난해 일산 사저 (私邸)에서 청와대로 입주할 때 이삿짐이 온통 트럭 3대분에 달하는 1만5천권의 손때 묻은 장서라고 했던 기억이 새롭다.

지난 7월 25일 지방 휴양시설로 휴가를 떠날 때는 자신의 경제이념과 정책을 정리한 '국민과 함께 내일을 연다 - DJ노믹스' (한국개발연구원) , 돈부시 미국 MIT 교수의 '세계 경제전망' '맹자' '우리 역사를 움직인 33가지 철학' 등 4권의 책을 가져갔다고 청와대 대변인이 발표한 바 있다.

저녁 뉴스시간에 한꺼번에 2~3대의 TV를 시청했다는 대통령 이야기는 있어도 휴가때 책을 들고 갔다는 대통령 이야기는 金대통령 이전에는 듣지 못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金대통령의 독서열이나 편력도 클린턴의 경우처럼 국민과 출판계가 숨죽이며 그것을 기다리는 '연중 문화행사' 는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측근들이 그런 문화적 이벤트를 좋은 의미에서 '만들어내고' '연출' 해내는 데까지는 생각이 못미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청문회가 누구의 말대로 "소득이라면 앙드레 김의 본명과 나이.출신 초등학교를 밝혀낸 것" 으로 끝난 것도 실은 우리 정치인들의 비 (非) 문화적.비지적 바탕 및 생활습관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윈스턴 처칠이 명연설가요, 노벨상을 받을 정도의 명문장가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 능력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처칠 자신이 노력해 만들어낸 것이다.

연설 재주를 타고나기는커녕 원래는 혀꼬부라지는 소리를 내는 언어장애가 있었다.

처칠은 눈물나는 발음교정 연습 끝에 이를 극복했다.

그의 뛰어난 산문도 일생 내내 동서고금의 고전을 탐독해 얻은 지적 바탕에다가 글의 운율까지를 고려하는 철저하고 세심한 다듬기 작업을 거쳐 탄생한 것이다.

독서를 통한 지적 축적도 없는 주제에 말 연습까지 게을리하니 여야 의원간에 오가는 것이 괜한 악다구니와 욕설뿐인 것은 당연하다.

정부도, 정치지도자들도 새 시대가 '지식사회' '지식이 자본인 시대' '지식지배의 사회'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기는 한다.

그러나 말뿐, 정부 당국도 정치지도자들도 그런 시대, 그런 사회를 위해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해도 크게 지나치지 않다.

그 규모나 장서 내용의 초라함은 둘째치고라도 명색이나마 공공 (公共) 도서관이라 불리는 곳이 전국 통틀어 4백곳을 넘지 않으며 문자 그대로 쥐꼬리만한 그나마의 예산도 90% 이상이 인건비와 건물유지비에 들어간다.

장서가가 대통령이 됐는데도 이런 현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지식사회를 만들자면서 정작 지식 인프라의 기본인 책에 무관심한 사회, 한낱 돈벌이 아이디어들을 '신지식' 이라고 명명 (命名) 해 그나마의 지적 풍토마저 훼손하는 사회. 이런 인식수준으로 지식사회.정보사회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인가.

"金장관, 최근 읽은 책 중에 추천해줄만한 게 뭐가 있소. " "金총무, 지난번 선물한 책 정말 좋던데. " 국무회의가, 당직자회의가 이렇게 시작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그렇게 언급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다면 국민을 위해서나 정치인들을 위해서나 좀 좋은 일인가.

클린턴은 딸과 함께 즐겨 서점을 직접 찾았다.

지식사회의 개막을 바란다면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이 서점을 찾는 일부터 시작할 일이다.

유승삼 중앙M&B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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