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최정례 '늙은 여자' 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한때 아이였기 때문에 그녀는 늙었다

한때 종달새였고 풀잎이었기에

그녀는 이가 빠졌다

한때 연애를 하고

배꽃처럼 웃었기 때문에

더듬거리는

늙은 여자가 되었다

무너지는 지팡이가 되어

손을 덜덜 떨기 때문에

그녀는 한때 소녀였다

채송화처럼 종달새처럼

속삭였었다

쭈그렁 바가지

몇가닥 남은 허연 머리카락은

그래서 잊지 못한다

거기 놓였던 빨강 모자를

늑대를

뱃속에 쑤셔넣은 돌멩이들을

- 최정례 (崔正禮.36) '늙은 여자' 중

젊은 시인인가 보다.

그래도 젊은이의 실험자국이 깨끗하게 가신 뒤의 정연한 묘사가 극약과도 같다.

좋은 느낌을 내내 일으켜 끝이 향기처럼 아쉽다.

한 노파의 풍경을 이렇듯이 그 저쪽의 과거로부터 싱그럽게 길어올려 아기이던 시절, 젊은 시절, 그리고 세상의 영욕에 길들인 시절들을 들어올려 오늘의 늙어빠진 괴멸 그것조차 이제 막 시작한 삶으로 바꿔놓는다.

아마도 20세기 말쯤 한국 시단에 여성시의 감수성이 제대로 꽃피어나는 건가. 다만 감각적인 것으로 마치지 말기를.

고은 <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