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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하기 좋은나라 멀었다] 협회 규제 官보다 심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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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각종 사업자단체에 대한 개혁이 겉돌고 있다.

경쟁원리를 도입해 값싸고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토록 한다는 목표 아래 지난해 8월 시작된 이 개혁은 1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걸음마단계. 분야별로 한 단체만 설립토록 하는 이른바 '설립강제' 와 모든 사업자가 의무적으로 가입케 하는 '가입강제' 만 철폐된 상태다.

요즘도 많은 사업자단체들은 정부로부터 위임.위탁받은 업무를 회원가입의 무기로 사용하고 있으며 회비징수를 둘러싼 잡음도 끊이질 않는다.

변호사협회.법무사회 등 힘 있는 단체에 대한 개혁작업은 이들의 반발과 로비에 밀려 국회에서 낮잠자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 규제연구센터 이주선 (李柱善) 박사는 "지도.단속 등 협회가 휘두를 수 있는 무기가 남아있는 상태에서는 진입 및 가격규제를 풀어도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어렵다" 며 "사업자단체에 대한 위임.위탁사무의 정비가 시급하다" 고 말했다.

◇ 실태 = 지난해 12월 서울 강남에서 서점을 연 高모 (35.여) 씨는 개업 직후 중.고교 참고서를 10% 싸게 판다는 광고전단을 돌렸다가 6개월 넘게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가게 넓이가 6평이어서 너무 작고 지하층이어서 정상적인 가격을 다 받으면서 장사가 안 될 것이란 판단 때문에 할인판매를 시작한 게 화근이었다.

며칠 안돼 서점조합연합회 서초지구위원회 임원이라는 남자 7~8명이 가게로 찾아왔다.

이들은 납품처를 확인한다며 서가의 책을 제멋대로 뽑아보더니 "협회가입도 하지않고 할인판매를 하면서 질서를 흐린다" 며 으름장을 놓았다.

이들이 다녀간 뒤 평소 책을 구입하던 총판에서는 "조합에서 불매운동이라도 벌이면 곤란하다. 현금을 줘도 안된다" 며 책판매를 거부했다.

할 수 없이 청계천 책골목 등에서 도매가보다 비싼 값을 주고 책을 사다 팔았다는 高씨. 그녀는 견디다 못해 지난 3월 공정위에 제소, 서점조합에 대한 시정명령을 이끌어 냈다.

협회가 기업활동을 옥죄는 경우도 많다.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결과 배낭을 만드는 업체들의 모임인 제낭공업협동조합은 신규 가입업체가 물량배분에 참여할 경우 기존업체들의 동의를 받도록 요구, 사실상 진입을 막았다.

또 피복공업협동조합은 정관에 규정된 가입요건을 충족했음에도 시설미비를 이유로 21개 업체의 가입을 거부하기도 했다.

심지어 서울시기계공업협동조합은 탈수기 계약과정에서 해당 품목 제조업체가 법령에 규정된 7개사에 못 미치자 탈수기와 관련이 없는 업체들을 포함시켜 계약을 따낸 뒤 물량 1백30여억원 가운데 96%를 이사장이 경영하는 Y엔지니어링에 편중배정하기도 했다.

◇ 회비 징수 논란 = 서울 관악구에서 슈퍼마켓을 하는 李모 (36) 씨는 담배를 떼올 때마다 갑당 1원씩 떼는 '조합비' 가 궁금하기만 하다.

담배값을 계산할 때마다 담배인삼공사 직원이 함께 받지만 李씨는 무슨 조합이든 가입신청서를 낸 기억이 없다.

李씨가 내는 돈은 한해 2만원 정도지만 한해 팔리는 국산 담배수 (50억갑) 로 따지면 50억원이나 된다.

이 조합비를 받는 곳은 한국담배판매인회. 담배가게를 표시하는 철간판을 무상 공급하고 외산담배 억제 캠페인 등을 벌이는 단체다. 실제로 정부의 위임.위탁사무를 독점해 온 일부 사업자단체들은 지나치게 많은 회비를 받아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건설관련 기술자 30만명의 경력관리업무를 담당하는 한국건설기술협회. 1인당 연 3만원의 회비를 받아 97년 기준으로 연간 1백23억원의 수입을 올렸지만 이 가운데 절반이 넘는 68억원은 협회 경상이익으로 처리됐다.

한국전기공사협회와 대한전문건설협회도 같은해 각각 57억원과 37억원의 경상이익을 냈다.

국내에 진출한 외국업체들도 사업자단체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다음은 주한 미국상공회의소와 주한 유럽상공회의소가 각각 최근 발간한 99년도 무역보고서의 내용. "증권거래소 1백65억원, 투신협회 3억원 등 금융분야 사업자단체들이 가입비 명목으로 과도한 진입비용을 요구하고 있다. "

"유해화학물질관리협회와 대한의료용구공업협동조합 등이 수입승인이나 등록 때 회사기밀에 해당하는 성분내역서 등을 제출하게 하면서 기밀보장도 하지 않는다. "

◇ 무엇이 문제인가 = 규제개혁위원회 관계자는 "위임.위탁사무가 너무 방대해 손대기가 힘들다" 고 토로했다.

경제부처의 한 사무관도 "이미 푼 규제를 정비하는데도 매일 야근하고 있다.

위임.위탁사무까지 다룰 여유가 없다" 고 토로한다.

민간연구소들도 민민규제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 한국경제연구원의 한 연구원은 "회원기업들로부터 거둔 회비로 월급을 받는 상황에서 민민규제 개혁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될 리 없다" 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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