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 지도가 바뀐다] 24. 채희완과 탈춤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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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채희완 형은 '탈춤적' 인 사람입니다. 탈춤판에서는 제아무리 재담을 잘 하고 춤을 잘 추는 사람이라도 제 얼굴을 드러내지는 않잖습니까. 그는 그렇게 사는 사람이고 또 그런 데에서 오는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에요. "

선뜻 얼굴 내밀기를 꺼리는 채희완 (蔡熙完.51) 부산대 무용학과 교수를 두고 부산 취재길에 동행한 임명구 민예총 민족굿위원회 위원장 (도서출판 명경 대표) 은 이렇게 말했다.

채교수가 전국에 탈춤바람을 일으킨 것은 서울대 탈춤반인 '민속가면극연구회' 의 창립으로부터 비롯된다.

70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한 그는 입학과 동시에 대학 게시판에 탈춤반 모집 공고를 붙였다. 재수하던 시절, 창경원에서 봉산탈춤 공연을 처음 봤을 때부터 꿈꾸던 바로 그 일.

이미 봉산탈춤 예능보유자인 김기수 (63) 선생으로부터 탈춤을 배운 뒤여서 춤사위 정도는 채교수 스스로 가르칠 수 있었다.

강철구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당시 서양사학과 학생).한석태 경남대 정외과 교수 (정치학과).진홍순 KBS 보도국 부주간 (동양사학과).서영수 단국대 한국학부 교수 (동양사학과).윤대인 성심병원 부원장 (고고인류학과) 등 10명 남짓이 탈춤반 창립 멤버로 채교수와 만나게 된다.

2대 회장을 지낸 영화감독 장선우 (고고인류학과) 씨를 비롯, 이종구 한양대 작곡과 교수 (작곡과).김석만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 (지리학과).황선진 인천문화정책연구소 이사장 (국문과) 등은 그해 9월 탈춤반 창립공연 이후 가세했다.

71년 문리대에 정식으로 등록한 탈춤반은 청바지와 통기타가 득세하던 시절에 민중문화로서 탈춤운동을 주도한다.

채교수는 73년 창립하는 이화여대.연세대.서강대 탈춤반 조직 과정에서 탈춤 강습과 이론 학습 등 결정적 역할을 한다.

연세대 탈춤반 초대 회장을 지낸 백규서 도서출판 동연 대표는 "채교수는 탈춤을 가르치고 탈춤에 내재된 민중의식과 관련한 토론도 이끌었다" 고 회고한다.

채교수는 74년 탈춤의 현장성을 계승, 철저하게 현장공연을 지향하는 '한두레' 를 창립했다. 이후 한두레는 70, 80년대 저항적 민중문화운동의 본거지가 된다.

채교수는 이때 가톨릭농민회의 이병철 (전국귀농운동본부장).유동우 (노동운동가, '어느 돌멩이의 외침' 저자).임정남 (전 '대화' 지 편집장) 씨 등을 만났고, 이후 현장공연은 이들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대중성' 과 '신명' 을 더해 노동자.농민.학생의 각종 집회와 시위에 활기를 불어넣은 탈춤운동이 군사정권의 눈총을 받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긴급조치 9호 발령 직후인 75년 서울대 시위사건인 이른바 5.22사건을 통해 탈춤패들은 한 차례 위기를 겪는다.

당시 복학생이던 문학평론가 고 채광석씨, 서울대 후진국사회연구회 신동수씨 등과 함께 채교수는 '김상진 추모제' 라는 이름의 시위를 기획한다. 표면에는 탈춤반.문예반.연극반이 나섰다.

대학내에 새로운 방식의 집회문화를 창출한 것으로 평가되는 이 사건으로 황선진 인천문화정책연구소 이사장.장선우 감독.유상덕 한국교육연구소장 등이 도피생활을 했고, 몇몇 한두레 활동가들도 수배자 명단에 올랐다.

78년 김민기 소극장 학전 대표가 극본을 쓰고 채교수가 연출한 노래극 '공장의 불빛' 공연은 청년문화운동의 중요한 한 전기. 이 공연 이후 대학가의 마당극에서 고전처럼 불려진 이 작품 속의 노래들은 모두 '아침이슬' 의 작곡가 김민기대표가 만들었다.

이 공연에 대해 김민기대표는 "음악에서 부족했던 서사성을 회복하려는 시도였으며 이를 탈춤과 연결했다는 큰 성과를 가진다" 고 회고한다.

채교수는 소설가 황석영.화가 김정헌씨 등과 함께 89년 민족예술인총연맹 (민예총) 의 창립을 주도한다.

초대 공동회장에는 시인 고은씨와 함께 영산 줄다리기 기능보유자인 고 조성국 (1919~93) 선생이 추대됐다.

88년 유인택 한국영화제작자협회장은 전국의 12개 마당극 단체가 참가하는 '민족극 한마당' 이라는 전국 규모의 마당극 축제 기획을 주도한다.

이 축제는 전국에서 활동하는 민중지향의 문화운동 세력들을 한 자리에 모은 것으로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 (민극협) 창립의 모태가 됐다.

이후 민극협은 당시 서구적 형식의 수입에만 치우치던 우리나라 연극 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기반이 됐다.

같은 해 채교수는 지리산 임걸령에 '민족통일 기원 장승' 을 세우는 '민족통일 대동장승굿' 을 벌인다.

이 굿은 서구적 관점에 의한 예술장르에는 포함되지 않는 풍물.무속굿.마당극.줄다리기.줄타기 등을 아우르는 총체연행물로서 민중문화운동의 영역을 확장한 것.

채교수는 또 하나의 문화운동 분야로 '한국적 몸짓의 언어 확보' 를 위한 민예총 '민족춤위원회' 를 이끌며 93년부터는 부산에서 '민족미학연구소' 를 설립하고 지금까지 줄곧 우리 문화 속의 아름다움을 찾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채교수는 '채교주' 로도 불린다. 문화운동으로서 많은 일들을 기획하고 실천하면서 얻어진 강한 리더십이 그에게 있기 때문은 아닐까. 부산에서 만난 채교수는 취침 시간 3시간을 빼고 30여 시간에 걸친 1박2일 동안의 술자리를 이어갔다.

취재 내내 흐트러짐 없이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는 채교수에게서 정신과 체력의 강인함을 엿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삶은 재미있어야 하고, 문화운동은 여럿이 함께 사는 삶을 더 신나게 만들어가는 과정" 이라는 그의 평소 지론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요즘, 오는 광복절에 부산 용두산공원에서 벌일 '정신대 해원상생굿' 의 준비 관계로 바쁘다.

탈춤에서 시작한 그의 활동은 이제 진보적 문화운동의 기반이자 핵심세력으로 확장돼가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고규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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