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뮤얼 헌팅턴 교수 유민기념 강연회 지상중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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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문명의 충돌' 의 저자 새뮤얼 헌팅턴 교수 초청, '유민기념강연' 이 12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3백여명이 넘는 청중들이 자리를 가득 메우는 등 뜨거운 열기 속에서 진행된 이날 강연회는 헌팅턴교수의 연설에 이어 김경원 (金瓊元) 사회과학원 원장과 김성복 (金成福) 뉴욕 주립대 사학과 교수의 토론으로 이어졌다.

이날 강연과 토론회 내용을 지상중계한다.

중앙일보의 창립자인 고 (故) 홍진기 회장의 추모강연을 맡게 돼 영광으로 생각한다.

한국의 발전이 놀랍고, 특히 하버드대 동료였던 DJ가 한국의 대통령이 됐고 한국에 민주주의가 정착된 것 등에 반가움과 기쁨을 느낀다.

오늘 강연의 주제는 '세계화와 문화 (Globalization and Culture)' 다.

세계화란 '국경을 초월해서 상품.자본.기술.아이디어의 교류가 확대되고, 세계 공동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표준 행동규범과 규칙을 만들어 나가는 노력' 으로 정의할 수 있다.

국적이 다른 기업간의 합병으로 형성된 국제적 대기업이나 일부 국가들이 자국의 통화를 달러화나 유로화에 연계시키는 것 등이 최근 확산되고 있는 세계화의 예다.

환경.인권.전쟁범죄.부패.마약 등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세계적 차원의 노력도 진행 중이다.

경제적 세계화는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해 '세계화의 정치학 (The Politics of Globalization)' 이라는 연설에서 지적했듯 민족주의.민중주의 (populism).보호주의.반자유주의를 이끄는 역효과를 내기도 한다.

세계화가 자신의 경제적 안녕과 문화적 생존을 위협한다고 느낄 경우 사람들은 이에 반발하게 되는 것이다.

문화는 특정집단의 기본신념.가치.태도.인식.가설.종교.언어를 가리킨다.

문명은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가장 큰 문화적 실체다.

문화적 요인이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20세기가 이데올로기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상이한 문화의 상호작용, 문화간 갈등이 최대 현안으로 떠오르는 문화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세계화로 범세계적인 단일문화가 창조될 것이며, 개별문화는 종국적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계화로 문화적 변화가 초래되기는 했지만 문화적 통합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서양식 소비패턴과 대중문화가 널리 전파되고 있지만 이는 일시적 유행일 뿐 수용국가의 기본문화를 변화시킬 정도는 아니다.

글로벌 미디어의 등장으로 세계 모든 사람의 신념과 태도가 동일하게 됐다는 가정을 뒷받침할 증거도 없다.

오늘날 모든 문화는 근대화 (modernization) 되고 있지만 근대화가 꼭 서구화 (westernization) 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는 경제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

지난 60년 가나와 한국의 경제지표는 거의 동등한 수준이었으나 30년 후 엄청난 격차가 벌어졌다.

절약.투자.근면을 중시하는 한국의 문화가 이같은 차이를 불러왔다.

문화는 또 경제조직의 형태에도 영향을 미친다.

일본.독일.미국처럼 인간에 대한 신뢰의 범위가 넓은 사회는 프랑스.이탈리아.중국처럼 신뢰의 범위가 가족.친지로 국한된 사회에 비해 대규모 다국적 기업을 발전시킬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주장했다.

그가 옳다면 이는 중국이 앞으로 세계 경제무대에 주요 주자로 부상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한국은 후쿠야마의 주장이 적용되지 않는 독특한 나라다.

신뢰의 범위가 제한적이면서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거대기업을 발달시켜 왔다.

이에 대해 후쿠야마는 거대기업을 육성하고 통제하기 위해 지난 60, 70년대 채택된 한국정부의 경제정책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문화가 경제개발에 미치는 영향은 '아시아적 가치' 에 관한 토론의 핵심이 되어 왔다.

지난 수십년 동안 동아시아 국가들이 이룩한 눈부신 경제발전은 이 지역 특유의 아시아적 가치 때문이라는 설명은 최근 동아시아의 경제위기로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모든 가치에는 부정적 측면이 있게 마련이다.

동아시아의 금융위기를 촉발시킨 것은 정실 자본주의, 투명성 결여 등 아시아적 가치의 부정적 측면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긍정적 측면이 경제난 회복에 일조하고 있다.

탈냉전 시대에 국가를 분류하는 기준은 냉전 당시의 삼각구도가 아니라 서방권.그리스 정교권. 중국권. 일본권. 이슬람교권. 힌두교권. 중남미권.아프리카권 문명 등 7~8개의 주요 문명이 돼야 한다.

또 현재 세계의 권력구조는 단일체제와 복수체제가 공존하는 형태다.

즉 유일 초강대국 (미국) 과 7~8개의 지역강대국, 제2 지역강대국, 그리고 여타국가들로 구성돼 있다.

이같은 추세는 동아시아의 국제정치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동아시아에는 6개 문명권에 속하는 국가들이 혼재한다.

4개 문명을 대표하는 중국.러시아.일본.미국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같은 국제정세 변화가 한국에 주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

첫째, 남북한간 전쟁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과장된 것일 수 있다는 점이다.

옛 소련과 유고슬라비아처럼 둘 이상의 문명으로 나뉜 국가들은 분열되고 있지만 유사한 문화를 갖고 있는 나라들은 서로 합쳐질 가능성이 크다.

동.서독은 이미 통합됐으며 홍콩.마카오 등은 중국과의 통합이 진행 중이다.

남북한의 경우 분쟁 가능성은 있지만 전면전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둘째, 한국문화는 중국문화와 긴밀히 연결돼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기독교가 널리 퍼지면서 서구적 요소가 상당부분 유입됐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지금도 사회의 안정과 화합을 저해하는 위험요소로 간주하고 있다.

셋째, 동아시아의 주도적 지역 강대국은 중국이며 제2의 지역 강대국은 일본이다.

이런 구도는 중국과 일본의 경쟁을 부추기고, 미.일관계를 강화시키며, 미.중간의 대립을 심화시킬 것이다.

통일한국이 출현한다면 일본은 이를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할 것이며, 한.중간의 긴밀한 유대가능성도 일본의 위기감을 증폭시킬 것이다.

이같은 도전은 한국에 기회를 제공한다.

한국은 경제 세계화에 가장 성공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국가다.

세계 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 주도적 지역 강대국 중국, 그리고 제2의 지역 강대국인 일본 사이에서 건설적인 균형을 도모할 수 있다.

정리=박장희.최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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