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부즈맨칼럼] 재산권 침해 제기못한 언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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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어느 사회에나 근본적 원칙 노릇을 하고, 자연히 시민의 논의에 자주 나오는 개념들이 있다.

만일 그런 개념들 가운데 어떤 것이 시민의 논의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그 사회에 무슨 근본적 잘못이 있음을 가리킨다.

지금 우리 사회에선 자주 나와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좀처럼 나오지 않는 개념들 가운데 하나는 '재산권' 이란 말이다.

삼성 이건희 (李健熙) 회장이 삼성자동차의 빚을 갚으려고 자기 재산인 삼성생명 주식 4백만주를 채권단에 넘긴 것은 심각한 함언 (含言) 을 갖고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재산권에 대한 침해문제다.

李회장의 재산 출연이 시민단체들의 공개적 요구와 관리들의 완곡한 권장이 있은 뒤 나왔으므로 그것을 자발적 행위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것을 재산권에 대한 침해로 보고 그런 각도에서 기사를 취급한 신문들을 찾기는 어려웠다.

예상과 달리 李회장의 재산 출연은 적대적 여론을 만났다.

생명보험회사의 상장은 李회장과 그의 친족에게 특혜를 준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당분간은 상장이 어렵게 됐고, 그가 내놓은 주식의 가치도 예상가치에 훨씬 못미치게 됐다.

그러자 재정경제부장관은 부족분을 李회장이 메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李회장의 재산 출연이 적어도 구체적 내용에선 그의 자발적 결정이었다는 허구마저 벗어 던진 발언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산권은 근본적이고 중요한 원칙이다.

재산권이 잘 세워지고 지켜지는 사회에서 경제적 자유는 저절로 보장된다.

반면 재산권이 제대로 서지 못한 사회에선 경제적 자유가 미미하다.

경제적 자유는 자유의 핵심으로, 이것 없이는 정치나 문화분야에서의 자유는 공허해진다.

그런데 이런 근본적 원칙을 허무는 일이 아무런 경계의 목소리도 없이, 아니 거의 모든 시민의 찬성 속에 일어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재벌이 오랫동안 '사회적 악한' 노릇을 해왔다는 사정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재벌을, 특히 재벌 총수를 질책하고 응징하는 일은 크게 환영을 받아왔다는 점에서 재벌은 우리 경제체제의 약한 고리였다.

그래서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에 적대적 이념과 세력들이 재벌을 집중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우리 경제체제의 방어선 안으로 쉽게 침입할 위험은 오래 전부터 예견됐었다.

이제 그런 위험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재벌의 총수는 큰 권한을 지니고 거기 따르는 큰 소득을 누린다.

반면 주식회사의 유한 책임이라는 제도 덕분에 그가 지는 책임은 그리 크지 않다.

그런 권한과 책임 사이의 차이를 우리는 흔히 '도의적 책임' 이라 부른다.

만일 어떤 재벌의 총수가 그런 도의적 책임에 동감하고 자신의 재산을 내놓는다면 그것은 크게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정부나 여론에 의해 강제됐을 경우 그것은 우리 사회가 선 바탕을 허무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에서 나올 이득은 우리 자본주의 체제에 난 상처로부터 두고두고 나올 손실에 비기면 미미할 것이다.

재산권이라는 원칙을 지키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고, 이 과정에서 신문들은 일정 몫을 맡아야 한다.

다수의 독자들에게 제품을 팔아 수입을 얻고 덕분에 권력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문은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자본주의가 아닌 체제들에선 '대형 (Big Brother)' 의 말씀만을 전하는 기관지들만 번창한다.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신문들은 재산권에 보다 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복거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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