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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아니면 '아니오' 해야지 (2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26) 이기붕과의 인연

나와 만송 (晩松) 이기붕 (李起鵬) 씨과 인연은 1951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에서 돌아온 나는 잠시 3군단 부군단장, 육군본부군수국장을 거쳐 그해 여름 국방부 3국장으로 발령이 났다.

국방부가 있던 부산에 가 보니 신성모 (申性模) 장관은 '국민방위군 사건' 으로 물러나고 이기붕씨가 후임 장관으로 와 있었다.

당시 육본은 대구에 있었고 전선은 중공군 참전으로 교착상태였다.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학살 사건은 신성모 장관이 경질된 직접적 배경이었다.

'방위군 사건' 이란 50년12월 정부가 제2국민병이란 명목으로 50만명을 징집했다가 김윤근 (金潤根) 사령관이 수송비와 식비 등 50억원을 횡령하는 바람에 1천여명이 굶어 죽거나 얼어죽은 사건이다.

'거창사건' 은 51년 2월 공비와 내통했다 하여 국군 토벌대가 거창 신원면 주민 수백명을 남녀노소 할 것없이 학살해 버린 사건이다.

당연히 임시 수도 부산의 민심이 흉흉했다.

이기붕 장관은 초기에 국방부와 국회로부터 좋은 평을 받았다.

李장관은 취임 즉시 방위군 사건 주범인 김윤근사령관을 비롯한 관련자 9명을 전격 구속했다.

이어 군법회의를 거쳐 8월31일 김윤근을 총살형에 처했다.

또 거창사건을 계기로 육군 수뇌부도 교체했다.

李장관이 이렇게 쾌도난마 (快刀亂麻) 식으로 의혹 사건을 처리해 나가자 국회와 국민들은 박수를 보냈다.

국회에서는 '만송의 깡마른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결단이 나왔을까' 라며 놀랍다는 반응이었고 언론도 '혼란 정국을 해소시키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는 식의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다.

내가 맡은 국방부 3국장은 국방예산과 물자동원을 담당하는 자리였다.

6.25 당시 10만명에 불과했던 국군은 불과 1년만에 66만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서는 엄청난 예산이 필요했다.

나는 국가재정이 어렵다는 점을 감안, 스스로 국방예산을 삭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각군에서 나온 예산 담당자들은 '제발 이번만은…' 하며 읍소 (泣訴) 작전을 펼치곤 했다.

반면 주무 부처인 재무부는 예산을 매년 깎아오던 터인지라 내심 흡족한 표

정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국방부 예산과장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내게 달려왔다.

국방부가 자체적으로 삭감해 올린 예산을 재무부가 다시 줄였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앞세우고 재무부 예산국장을 찾아가 강력 항의했다.

그 바람에 국방부 예산은 원안대로 국회에 제출됐다.

하지만 재무부가 가만 있지 않았다.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물밑 공작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국회에서 국방예산 심의가 있는 날이었다.

이기붕 장관과 김일환 (金一煥) 차관, 주무 국장인 나와 경리국 장교들이 국회에 출석했다.

그런데 국방위원들이 전쟁수행 지원 차원에서 심의를 하는 게 아니라 순전히 자신들의 이권과 결부시켜 왈가왈부하는 것이었다.

나는 심히 못마땅했다.

"이 순간에도 일선 고지에서 장병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소위 국회의원이란 사람들이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국정을 이런식으로 처리하다니…" 나는 순간적으로 격분한 나머지 벌떡 일어나 "국방위원 여러분, 국방정책이 무엇인지 안 후에 국방예산을 심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국방위 경험이 많은 임흥순 (任興淳) 위원이 "지금 국회의원을 훈계하는 거냐!" 며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흥분한 내가 다시 일어나려 하자 옆에 있던 金차관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가만히 있어!" 라고 꾸짖는 바람에 그만 참고 말았다.

자연 휴회가 됐다.

국방부로 돌아 온 나는 李장관에게 사의를 표했다.

'장관을 모시고 국회에서 큰 결례를 저질렀기 때문' 이라는 사유를 내세웠다.

그러자 李장관은 "잘했어. 젊은 장교들이 나라를 위해서 그만한 용기쯤 있어야지. 그만두긴 왜 그만둬?" 하며 오히려 나를 위로해 줬다.

글= 강영훈 전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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