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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면 월스트리트 은행가 되고 싶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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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호 06면

저우유광 선생이 16일 오후 자신의 서재에서 김명호 교수에게 최근 쓴 글을 보여 주고 있다. 베이징=이양수 기자

저우유광(周有光) 선생과의 대화는 중국 지식인들이 치를 떠는 문화혁명 시대로 옮겨 갔다. 선생은 마오쩌둥이나 홍위병을 대놓고 비난하지 않았지만 은유적으로 가시 돋친 얘기를 몇 차례 했다.

新중국 60년, 대륙의 현인을 만나다 ① 문자개혁의 주역, 저우유광

김명호: 문화혁명 때 함께 쫓겨난 분 중에 유명 인사가 많은 것으로 압니다.

저우: 참 재미있다. 역사의 변화가 너무 빠르다. 많은 젊은이가 미국에 가고 있는데 어떤 이는 내게 ‘그때 왜 귀국했느냐’고 묻는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그때 미국에서 귀국한 사람들은 나만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중국에도 희망이 있다’면서 귀국했다. 중국공산당은 항일전쟁 때 인민들의 지지와 옹호를 받았다. 전쟁 승리 직후 국공담판을 위해 마오쩌둥이 장제스(張介石)를 만나러 충칭(重慶)에 온 적이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뒤 첫 마디가 “장 위원장 만세”였다. 마오는 얼마 있다가 옌안(延安)으로 돌아갔는데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충칭에 쭉 머물렀다. 저우언라이는 공산당 대표로 정치협상회의 부주임을 맡았다. 나도 경제를 하는 사람이었고 저우언라이의 비서도 경제를 하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같은 잡지에 계속 글을 쓰면서 서로 알게 됐다. 그때는 그 사람이 공산당인 줄 몰랐다. 당시 매달 한 번 회의가 열렸는데 저우는 ‘우리가 이름은 공산당이지만 사실은 민주를 제창하는 당이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충칭에서 저우언라이와 뜻이 잘 맞았다.

김: 선생께서 충칭에서 딩충(丁聰:유명 화가·만화가)을 향해 좌경유치병(左傾幼稚病)이란 말을 하셨나요. 황먀오쯔(黃苗子)·우쭈광(吳祖光) 등과 함께 이류당(二流堂)에서 생활할 때입니다.

저우: 딩충은 그때 젊고 귀여웠다. 우리 부부가 그를 참 좋아했다. 내 아들은 딩충을 숭배했다. 나는 집안에서 농담조로 “딩충은 좌경유치병에 걸렸어”라고 했다. 근데 우리 아들이 딩충에게 그 말을 일러주었다. 훗날 내 아들(76세)이 70살 때 ‘사실은 그때 아버지가 딩충보다 훨씬 더 증세가 심했다’고 하더라.(웃음) 상하이가 해방됐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한 것도 좌경유치병 때문이다. 지식인 중에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지식은 미래·과거의 두 방향으로 발전
김: 한국에는 가신 적이 있나요. 100세 넘어 해외여행을 했는지요.

저우: 아직 못 가보았다. 휠체어를 타고 가정부도 있고 해서 해외 나가는 것은 여러모로 불편하다. 80세 넘어서도 해외에 많이 갔었는데 100세 이후에는 못 갔다. 해외에 가려면 보험을 들어야 하는데 100살 넘으면 보험회사에서 보험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래서 외국에서 초청할 엄두를 못 낸다고 한다.

김: 선생님은 국보급 인물인데 출국 승인이 나겠습니까.

저우: 나는 국보(國寶)가 아니라 훠보(活寶)다. 상하이 사람들이 남을 욕할 때 훠바오(고지식한 사람을 가리키는 속어)라고 한다.

김: 한국 사람들을 만난 적은 없는지요.

저우: 뉴욕에 있을 때 한국 여자가 하는 식당에 간 적은 있다. 85세에 은퇴하기 전 국제학술회의에서 한국인들을 접한 적이 있다. (주 선생은 책장에서 97년 출간한 『세계문자발전사』를 꺼내 한글 관련 부분을 보여줬다) 예전에 한글을 배웠는데 자주 안 쓰니 잊어먹었다. 100살 넘어서부터 기억력이 심하게 떨어졌다.

김: 한국의 한자 교육에 대해 조언을 해주신다면.

주: 학술회의 때 만난 한국 사람들의 한자 수준은 아주 높았다. 아마 중국의 일반 교수보다 더 높았던 것 같다. 오늘이 옛날을 해쳐서는 안 된다. 인간의 지식의 한쪽은 미래를 향해, 다른 한쪽은 고대를 향해 이렇게 두 개의 방향으로 발전한다. 고고학계에서 옛날 글자들을 발굴해내는 덕에 현대인들이 옛날 사람들보다 고대 한자를 훨씬 더 많이 알게 됐다. 공자도 갑골문을 모르지 않았는가. 따지고 보면 우리가 공자님보다 더 많이 아는 것이다.(웃음)

중국, 美 중소도시 발전 모델 배워야
김: 중국은 엄청나게 강대해졌습니다.

저우: 중국이 강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돈이 많아지고, 잘살게 됐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못산다고 얘기한다. 중국 전체 GDP(국내총생산)가 올라갔다고 하지만 1인당 GDP를 보아야 한다. 1인당 GDP로 보면 아직 빈곤국이다. 요즘 많은 사람이 글을 쓸 때 과장을 하고 있다. 이것은 정말 좋지 않다. 외국 기자들도 허튼 소리를 많이 한다. 미국에 가보면 극좌부터 극우까지 별별 신문이 다 있다. 사람들은 신문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걸 다 찾을 수 있다. 근데 우리 사람들은 거기 가서 우리를 칭찬해주는 글만 찾아온다. 우리를 욕하고 비판하는 글은 찾지 않는다.

김: 그래도 공부할 건 하겠지요.

주: 1940년대 미국에선 좋은 것들이 대도시, 특히 뉴욕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중소도시들이 발전했다. 예를 든다면 캘리포니아주 샌타바버라라는 작은 도시가 있는데 대통령을 한 사람도, 스타 배우도 주말을 지내곤 한다. 저녁식사 때는 촛불을 켜고 전등을 켜지 않는다. 미국의 경제와 문화는 이런 중소도시에 있다. 대도시는 몰락했다. 그런데 우리 관료들은 미국에 가서 대도시만 휙 돌아보고 온다. 어떤 잡지에서 내게 글을 요청한 적이 있다. 1만 자 글로 미국 전체를 포괄적으로 써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미국의 발전 배경’이란 제목으로 썼다. 짧은 글로 미국의 특징을 다 쓰려니 쉽지 않았다. (97세 때 쓴 글임)

경제 떠나 언어분야 일한 덕에 살아
김: 선생님께서 다시 태어난다면 무슨 일을 하실 건가요.

저우: 만일 다시 시작한다면, 음… 이럴 것 같다. 나는 원래 경제학을 공부하고 은행에서 일하던 사람이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유명한 은행에서 일했는데 그때 은행들은 지금처럼 크지 않았다. 그 은행의 주소는 월스트리트 1번지였다. 나는 그때 제국주의의 중심에 있었다. 다시 일한다면 월스트리트의 최고 은행가가 되고 싶다. 아주 재미있는 일은 공산당이 제국주의를 욕하면서 제국주의의 중심을 월스트리트라고 지목한다. 그러나 월스트리트가 어떤 곳인지는 잘 모른다. 소련 붕괴 뒤 키신저가 한 말이 맞다. 소련은 자기 스스로 자기 힘을 다 소모하고 스스로 무너졌다. 참 맞는 말이다. 이런 말도 있는데 참 재미있다. 첫 번째로 마르크스가 말을 잘못했고(講錯了話), 두 번째로 스탈린이 일을 틀리게 했고(做錯了事), 세 번째로 마오쩌둥이 길을 잘못 따라갔다(<8DDF>錯了路)….(웃음)

김: 문자개혁을 하던 시절이 기억납니까.

저우: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와 문자개혁위원회에서 일했는데 나는 한어병음 분야를 맡았다. 한어병음이 나온 지 51년 됐다. 그동안 한어병음은 아주 큰 역할을 했다. 컴퓨터나 휴대전화를 쓸 때 모두 병음을 쓰고 있다. 45세 이하 젊은이들은 병음을 다 안다. 1955년에 경제 분야를 떠나 언어 분야로 업종을 바꿨다. 이게 아주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문화혁명 때 반우파 투쟁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하이는 경제중심이고 경제학 교수 10명 중 9명은 미국에서 귀국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당연히 반혁명분자로 몰렸다. 만일 내가 상하이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큰 변고가 생겼을 거다. 친한 친구들은 그때 다 죽었다. 닝샤에 있을 때도 노동개조범은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다. 그때 1개 단위에 5000명씩, 모두 24개 단위가 있었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운 좋게 죽음을 피한 거다. 그래서 나는 하느님이 뭔가 여러 번 착각한 거라고 얘기하곤 한다.

소련이 간 길은 막다른 죽음의 골목
김: 선생님은 민국 시대, 신중국 시대를 살았고 미국에서도 일했습니다. 체제가 어떻게 다른가요.

저우: 중국 사람은 전통적으로 친미적이다. 중국공산당이 반미를 했다. 옛날에 후스(胡適)와 천두슈(陳獨秀)가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천이 제국주의 운운 하니까, 후는 ‘무엇을 제국주의라고 하느냐’라고 반문했다. 그때는 제국주의가 무엇인지 다들 확실히 몰랐다. 후는 제국주의라는 게 원래 없다고 주장했다. 중국공산당은 소련공산당의 지부였다. 천은 ‘민족에는 계급성이 없다’고 주장하다 소련에서 ‘민족에도 계급성이 있다’고 말하니까 그걸 따라갔다. 천두슈 이후에 장궈타오(張國燾:훗날 캐나다에서 동사함)가 미국을 ‘제국주의’라고 지목했다. 뒤돌아보면 선전 분야에서 소련은 성공했고 미국은 실패했다. 소련이 왜 붕괴됐는가 하면 길을 잘못 갔기 때문이다. 소련이 간 길은 막다른 죽음의 골목(死胡同)이었다. 근본을 잘못 알았다. 당시 소련은 유럽에서 공업이 제일 발달한 나라였다. 그런데 붕괴 뒤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먹는 것은 호주·미국에서 가져가고, 옷과 가전제품은 중국 것을 가져간다. 러시아에는 농업도 없다. 어떤 글을 보니 러시아의 농업수준이 이제야 1914년 수준으로 회복했다고 한다. 이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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