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했다는 마음’조차 버리는 茶香을 닮은 여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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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호 31면

호국의 성지요, 차의 성지인 땅끝 대흥사의 새벽 숲길에는 종달새의 청명한 울음처럼 깊은 울림이 있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아침 이슬이 채 걷히지 않은 촉촉한 산길을 따라 20여 분을 걷노라면 초의 스님이 주석하셨던 일지암이 나온다.

내가 본 김의정 회장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이 극찬했던 ‘유천(乳泉)’의 물을 길어 일지암 자우홍련사 툇마루에 앉아 차 한 잔을 마신다. 송풍회우(松風檜雨)의 진한 맛이 그대로 가슴속을 뒤덮는다. 초의 스님께서는 “진실로 차의 도(道)를 맛보려면 홀로 차를 마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의미를 깨달으려면 일지암으로 가라. 홀로 차를 마시면 가끔씩 진한 그리움으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일지암 복원에 기여한 명원 김미희 선생과 따님 김의정 선생이다. 그는 대한불교조계종중앙신도회 회장이자 명원문화재단 이사장이다.

일지암을 비롯, 우리 문화재에 대한 김의정 회장의 사랑은 대단하다. 차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일지암 자우홍련사 툇마루 차실에 앉아 차를 마시길 염원한다. 그러나 김 회장은 그곳에서 차를 마시지 않고 자우홍련사를 바라보며 차를 마신다. 그렇게 하는 이유에 감동이 있다. 세월이 흘러 연약해진 일지암 툇마루가 많은 사람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김 회장은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깊고도 따사로운 분이다.

한국 다도의 종가인 명원문화재단과 대흥사·일지암이 2대에 걸쳐 이어온 인연은 매우 깊다. 명원 김미희 선생은 일지암 복원에 기여하셨고 김의정 회장은 오늘의 일지암을 보존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두 분은 한국 차문화와 한국 차의 성지인 일지암을 지독히도 사랑하는 분들이다. 자비의 손과 마음을 가진 관세음보살 같은 분들이다. 부처님께서는 그 어떤 행위나 마음에도 상(相)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김 회장은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한국 재가 불자들의 50년 숙원사업인 중앙신도회관을 어렵게 건립하고도 모든 공(功)을 스님들과 협력해 준 재가 불자들에게 돌렸다. 그리고 ‘초의문화제’와 ‘대한민국차인대회’ 등 한국 차문화를 위해 열리는 다양한 행사에도 끊임없이 기여를 하면서도 단 한번 그 같은 사실을 외부로 알리지 않는다. 『금강경』의 가르침처럼 보시하는 행위도, 보시했다는 마음조차도 바로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김 회장은 철저하게 따르고 있는 것이다.

김 회장은 번다한 세속 일을 뒤로하고 불쑥 대흥사와 일지암을 홀로 찾는다. 그리고 손수 유천의 물을 길어 초의 스님께 차를 올리고 차를 마신다. 명원 김미희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고운 한복을 입고 차를 마시는 그 모습은 초겨울 하얀 차꽃을 그대로 닮았다. 천수천안(千手千眼)의 마음으로 차를 마시고, 천수천안의 맑은 청향의 향기를 가진 차향처럼 세상을 조용히 맑히는 사람이 바로 김의정 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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