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우 기자의 까칠한 무대<14>스캔들을 위한 변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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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호 05면

‘20세기 안무가’ 게오르게 발란친(1904~83)은 여성 편력이 심했다. 남들은 한 번 하고도 질려 한다는 결혼을 무려 네 번이나 하고도 성이 안 찼는지 자신이 안무한 작품의 주역 발레리나들과 툭하면 염문을 뿌렸다. 화려한 스캔들의 정점은 회갑을 막 넘긴 65년, 폭풍처럼 찾아왔다. 바로 40세 연하의 수전 패럴이었다.

이 작고 앙증맞은 발레리나가 그는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았나 보다. 막 스무 살을 넘긴 신인을 당당히 주인공으로 세우는 것은 물론 그녀를 위한 작품을 따로 만들기까지 했다. 그때 태어난 게 발란친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인 ‘돈키호테’다. 여기서 여주인공 ‘키트리’의 당돌하면서도 통통 튀고, 엉뚱하지만 발랄한 캐릭터는 전적으로 패럴을 염두에 두었기에 가능했다. 후대의 평론가들은 이 시기 발란친의 작품들에 대해 “네오클래식 발레의 형식을 진일보시켰다”고 극찬하니, 오 사랑의 위대함이여!
발란친만 그러랴. 명작에 얽힌 예술가와 여인의 사랑은 숱하게 많다.

로댕과 카미유 클로델이 그랬고, 영화감독 우디 앨런에겐 미아 패로가 있었다. 불륜과 외도, 상처와 배신 등 예술가들의 사랑 이야기만을 묶어낸 책이 출간될 정도다. 그런 에피소드를 접하다 보면 문득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쏟아부었다는 오롯한 예술혼에 회의감마저 든다. 바로 눈앞에 있는 그녀를 붙잡기 위해 몸이 달아 쓴 게 우연히 명작이 된 건 아닐까.

23일 국내에서 개막한 세기의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탄생에도 극적인 러브스토리가 있다. 바로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여배우 세라 브라이트먼이다. 이미 30대 초반에 거장 반열에 오른 ‘유부남’ 웨버에게 운명처럼 사랑이 다가온 건 81년 ‘캣츠’였다. 당시 뒤편에서 별로 눈에 띄지도 않는, 앙상블 고양이 브라이트먼에게 꽂힌 웨버는 이혼을 하고 84년 그녀와 재혼한다.

사랑의 힘은 천재 작곡가의 창작욕을 더욱 불타게 해 ‘오페라의 유령’에서 소름이 돋을 것만 같은 크리스틴의 고음은 철저히 브라이트먼의 음역대에 맞춘 것이었다. 브라이트먼이 86년 런던 초연 무대에 서는 건 당연했고, 급기야 “브로드웨이 공연에선 브로드웨이 배우만이 설 수 있다”는 불문율까지 무시한 채 웨버의 고집과 협박으로, 브라이트먼은 88년 미국 초연 무대에도 설 수 있었다.

드라마틱한 예술가들의 사랑, 거기엔 하나의 공통점이 있으니 그건 좀체 ‘조강지처’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찔하고 아슬아슬하기에 아드레날린의 분비가 더욱 촉진됐을까. 그토록 몸바쳐 위태로운 사랑을 저지르고, 그게 위대한 작품까지 이어져 명성을 쌓았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결말까지 해피 엔딩은 아니었다. 발란친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패럴은 발란친의 다섯 번째 결혼 구애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채 동료 남자 무용수와 눈이 맞아 발레단을 떠나간다. 영원할 것만 같던 웨버와 브라이트먼의 사랑도 90년 이혼과 함께 파경을 맞이한다. 우연인지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에비타’ ‘캣츠’ ‘오페라의 유령’ 등 내놓을 때마다 메가 히트를 쳐 온 웨버의 작품은 브라이트먼과 헤어진 이후 급격히 쇠락해 간다. 그러니 전율이 날 만한 웨버의 음악을 다시 듣고자 한다면 그에게 ‘금지된 사랑’이 또다시 찾아오길 기원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중앙일보 문화부 공연 담당 기자. 타고난 까칠한 성격만큼 기자를 천직으로 알고 있다. 올해로 3회째를 맞은 ‘더 뮤지컬 어워즈’를 총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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