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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이야기꾼의 세태풍자-성석제 신작중편 '호랑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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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소설가 성석제씨 (39)가 신작 중편 '호랑이를 봤다' (작가정신.5천원) 를 펴냈다.

가상현실과 유전자복제의 시대, "옛날 옛적에 아무개가 살았습니다" 하는 식으로 능청스런 이야기를 해온 그는 이번 작품에서도 전문 이야기꾼으로서 새로운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물레방아가 돌던 마을에 사는 어느 노인의 이야기'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데 저 혼자 쫓겨다닌 청년의 이야기' '자식이 아홉이나 되는 집안의 장녀가 할 만한 이야기' '인생에 통달한 어느 노부인의 이야기' 식으로 짤막한 이야기를 조각조각 이어 한 편의 소설로 빚어낸, 이른바 '조각보 이불식 서사 (敍事)' 가 그것.

제각각 1인칭 시점에서 저마다의 사연을 그야말로 '이야기' 처럼 들려주는 등장인물들은 원고청탁을 받은 소설가 자신에서, 이번에는 확실한 사업아이템이 있다고 장담하는 소설가의 친구, 멀쩡한 청년을 꼬드겨 사이비성이 농후한 건강식품사업을 벌인 전주 (錢主)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 사이사이 삽입되는 '어느 경리사원이 중고 전동식 타자기로 정서한 로열티 수입 전문 박사의 추천사' '망하고도 말이 많은 오리 회사 공장장이 산꼭대기에 있는 공장 정문에 써붙인 사과문' 등은 세태에 대한 재담 (才談) 이 얼마나 다채로운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지를 보여준다.

같은 문학장르이면서도 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설의 형식실험이 쉽지 않은 것은 어쩌면 서사장르가 불가분 갖게 되는 통속성 때문일 터. 경기도 이천의 작업실에서 글쓰기에 몰두하다 모처럼 서울을 찾은 작가는 "때로는 한줄짜리 소설, 독해불가능한 부호로 가득한 소설이란 것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말로 '형식' 에 대한 자신의 고민을 넌지시 드러냈다.

하지만 그의 형식주의는 구름위의 사유보다는 저잣거리의 소문에 후한 탓에 독자에게 그다지 모난 데 없는 고집으로 읽히곤 한다.

예컨대 '아사리의 사전적 정의' 란 대목을 "불교에서, 스승이 되어 제자를 가르칠 만한 덕을 갖춘 고승을 일컫는 말" 이라고 근엄하게 출발한 작가는 "어지러운 정도의 우열을 표시하면 이판사판 <아사리판≤난장판><개판이 된다.< p>

난장판과 개판 사이에는 '개판 5분 전' 이 있을 수 있다" 라고, 태연자약한 익살을 부린다.

이처럼 그가 선보이는 유희, 또는 통속 (通俗) 을 관통하는 서사는 근대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세련된 기법을 발전시켜온 '소설' 에 앞서 할머니에게 어린 시절 들은 '이야기' 가 있었음을 돌이키게 한다.

이 옛날 이야기에 가장 흔한 등장인물이 바로 호랑이 아니던가.

비유하자면, '호랑이를 봤다' 는 현대판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 다.

책 첫머리 '작가의 말' 에서 "인생은 반복" 이라고 운을 뗀 작가는 "오늘은 어제의 동어반복이며 나는 남의 반복" 이라고, "달라지려고 해도 달라지려는 것 자체가 평범한 것이 되고 마는 것" 이라고 주장한다.

도입과 마무리가 같은 이야기로 이어지는 이번 소설의 순환형 구조는 그런 작가의 입장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다.

최근 한 일간지에 연재소설을 시작, 다른 작품쓸 여유가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에 그는 "연재에 매일 생각이었으면 시작하지 않았을 것" 이라면서 앞으로 그가 풀어낼 줄줄이사탕같은 이야기에 대한 기대를 남겼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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