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칼럼] '말'이 안통하는 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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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부.여당이 계속 헤매고 있는 것 같다.

각종 의혹사건으로 민심이 들끓고 노동계가 강경투쟁을 벼르고 있는데다 북한의 서해침범사태까지 터지고 있다.

지금 뭐가 뭔지, 여권이 어떤 수순 (手順) , 무슨 대책으로 이 난국을 헤쳐나가려 하는지 통 알 길이 없다.

딱한 것은 상황이 이렇게 심각한데도 정부.여당의 인식과 자세가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가지 예를 보자. 정부.여당 내부에 직언 (直言) 이 있느냐는 물음이 빗발치자 주요 관계자들의 대답은 모두 '있다' 는 것이었다.

김종필 (金鍾泌) 국무총리는 몽골에 있던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전화를 받고 김태정 (金泰政) 전 법무부장관 문제에 관해 "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 결심을 해야겠다' 고 말했으나 대통령이 귀국 후 그냥 데리고 쓰겠다고 하는데 날더러 대통령과 싸우라는 말이냐" 고 했다.

김중권 (金重權) 비서실장도 "내가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린 일이 없다" 고 했고, 국민회의도 대통령에게 직언하는 통로가 4~5개 있다며 직언이 없었다는 비난을 부인했다.

다 할 말은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직언을 했는데도 대통령이 듣지 않고 잘못 판단하는 바람에 이런 위기가 왔다는 말인가.

아니면 직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실은 직언이 아니었던가.

또는 직언이라고 한 것이 너무 의지가 부족한, '적당한' 내용이어서 대통령이 흘려버린 것인가.

어떤 경우라도 문제는 심각하다.

직언을 정말 했다면 지금 위기의 책임은 몽땅 대통령에게 넘어가고, 실은 직언을 안한 것이라면 참모들의 책임이 면제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적당한' 직언을 했다면 대통령과 참모들에게 함께 책임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직언이란 한번 해보고 안듣는다고 그만두면 직언이 못된다.

옛날 왕조시대처럼 도끼를 메고 나가 상소하지는 못할망정 민심이 떠나고 파문이 커질 것을 뻔히 보면서도 대통령의 잘못된 판단을 그냥 보고만 있어서는 직언을 했다고 하긴 어려울 것이다.

하물며 자기네가 직언을 했다고 하면 책임이 바로 대통령에게 돌아가는데도 그렇게 우기는 것은 책임모면의 자세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직언이 안통하면 그만두는 사람도 있을 법한데 그런 일도 없다.

그렇다고 金대통령 자신도 참모 때문에 잘못 판단했던 것으로 보긴 어렵다.

金대통령은 옷사건 수사에서 金전법무부 장관 부인의 잘못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그를 유임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나는 같이 일한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여론몰이로 희생당하면 국가나 대통령에게 충성하지 않고 딴 데 눈치를 볼 것" 이라는 말도 했다.

이런 말을 들어보면 金대통령이 여전히 옷사건의 본질을 모르는 게 확실하다.

옷사건은 수사결과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고관부인들의 행태가 문제였고 민심의 분노도 거기에 있었는데 대통령은 그런 민심을 '여론몰이' 로 봤고 민심보다는 '충성' 을 중시한 게 아닌가.

결국 문제는 대통령 자신에게 더 있었고, 그런 대통령의 문제를 시정할 직언은 없었던 것이다.

대통령이 국민회의 의원들을 상대로 이런 말을 한 지난주 청와대 만찬에서는 대통령이 혼자 70분간을 얘기하고, 다른 두사람이 인사말과 건배제의를 했을 뿐 그 누구도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평소 대통령을 만날 기회가 없다고, 직언할 기회가 없다고 불평하던 여당의원들이 이런 심각한 시국에서 모처럼 대통령을 만나고서도 전혀 발언을 하지 못한 것이다.

이러고서야 여권에 무슨 언로 (言路)가 있다고 하겠는가.

지난 4월 국민회의 원내총무 경선에 나선 한 후보는 "당선되면 대통령과 의원들의 면담을 적극 주선하겠다" 는 공약까지 내걸었다던 일이 생각난다.

이렇게 볼 때 집권측이 지금 맞고 있는 위기의 본질은 스스로 드러나는 셈이다.

원내총무 후보가 대통령면담을 선거공약으로까지 내걸 만큼 언로가 막혀있고, 모처럼 대통령을 만나도 말 한마디 못하는 풍토에서 민심이 제대로 전달될 리가 있겠는가.

이런 상태라면 여권에게 민심은 계속 '여론몰이' 가 되고 의혹제기는 '발목잡기' 밖에 안될 것이다.

대통령이 그릇된 판단을 해도 시정할 기회도 사람도 있기 어려울 것이다.

국정조사라는 모처럼의 호수 (好手) 를 단독 강행이란 악수 (惡手) 로 바꾸는 데도 직언이 없는 것을 보라. 말이라는 피가 돌지 않는 조직은 동맥경화증에 걸릴 수밖에 없다.

언로가 트이고, 직언을 하고, 직언할 수 있는 체제와 분위기를 만드는 민주화.탈 (脫) 권위주의의 자기경신 (更新) 이 없고서는 집권측의 위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송진혁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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