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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왕 방한 추진한다는데 … 궁내청 조선의궤부터 반환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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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호 12면

조선왕조실록에 이어 조선왕조의궤 환수운동을 펴고 있는 혜문 스님. 일본 왕실궁내청 서릉부에는 현재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를 비롯, 72종의 의궤가 보관돼 있다. 혜문 스님은 명성황후의 죽음에 대한 당시 일본 측의 문헌과 이에 대한 정보를 모은 책 『조선을 죽이다』(작은 사진)를 최근 펴냈다. 신동연 기자

“제가 가장 좋아하는 역사 속 인물이 대원군입니다. 명성황후에 대해서는 좀 부정적이었죠. 오히려 일본인들이 쓴 글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명성황후를 명민한 두뇌와 신랄한 수완, 그들의 표현대로 하면 ‘여성 특유의 음험함’까지 갖춘 조선 최고의 인물로 평가하고 있어요. ‘동양의 호걸’인 대원군도 명성황후의 견제를 받아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이런 명성황후이니 일본의 손꼽히는 정치가들이 손을 잡으려다 뜻대로 되지 않자, 일본제국의 안위에 위험하다고 여긴 것이지요.”

일본이 가져간 오대산 史庫本 추적하는 혜문 스님

조선총독부가 궁내청에 의궤 기증
최근 『조선을 죽이다』를 펴낸 혜문 스님의 말이다. 이는 을미사변, 즉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당시 일본 측의 문헌을 우리말로 옮기고 이에 대한 정보를 담은 책이다.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민후조락사건’이라는 문헌이다. 한성순보 기자이자 사건 가담자였던 고바야카와 히데오가 남긴 글이다. 조선의 정세, 당일 상황, 이후 일본에서의 재판 과정 등이 담겨 있다. “일본인들이 사건을 어떻게 주장하고 있는지 냉정하게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새로 번역했습니다. 가담자들이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내부에서 돌려보던 선전물 성격입니다. 물론 그 주장을 그대로 옮길 수만은 없죠. 주석·해제를 붙인 것은 그래서입니다.” 예컨대 이 문헌은 명성황후를 죽이려던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면서도 정작 황후를 죽인 것은 ‘양복 입은 조선인’이라는 식으로 써놓았다. “지금도 일본 우익들은 마찬가지예요. 얼마 전 일본의 TV에서 사건에 가담한 일본인의 후손이 한국을 다녀간 내용을 방송했어요. 인터넷에 댓글이 여럿 붙었는데, 대개 조선인들이 죽여놓고 왜 일본에 책임을 돌리냐는 식이었죠.”

그는 명성황후의 죽음을 흔히 시해(弑害)로 부르는 데 문제를 제기한다. “시(弑)는 신하가 자기 임금을 죽이는 걸 뜻합니다. 예컨대 봉건시대였다면 10·26 사건이 이런 예겠지요. 『자치통감』 『춘추좌전』 같은 옛 중국 문헌을 보면 남의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건 다른 문자를 씁니다. ‘시해’는 죽은 사람을 높이는 게 아니라 조선 사람이 죽인 것이라는 식으로 여기게 하는 표현입니다.”

그는 “사건에 가담한 일본인들이 무죄 판결을 받은 것도 이런 시각과 관련 있다”고 했다. “재판에 앞서 이미 조선인 세 사람이 조선에서 역모죄로 사형된 것이 영향을 미쳤음을 이 문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셋 중 두 명은 끝까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친일파 이주회는 자신이 범인인 양 굴었지요.” 이 문헌은 자신들을 구원하고자 한 ‘조선의 협객’이라며 이주회를 한껏 칭찬한다. 당시의 상황을 헤아리면 이런 주장은 진상과 거리가 있다. 사건 직후 조선의 조정에서는 죽은 명성황후를 살아있는 것으로 여겨 서인으로 강등하는 일도 벌어졌을 정도였다. 1895년 10월 8일 숨진 명성황후의 장례는 2년여 뒤에야 치러졌다. 고종은 그 직전 대한제국을 선포했고, 국장은 황후의 예로 진행됐다.

“명성황후 사건은 조선독립운동사의 시발점입니다. 을미의병이 일어나고, 이들 중 일부가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이 된 것이 그렇죠. 안중근 의사가 꼭 100년 전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도 그렇습니다. 국모, 즉 명성황후를 죽인 죄를 그 이유 중 하나로 밝혔지요. 지금까지 이어지는 반일감정의 원류도 여기에 있습니다.”

명성황후에 대한 그의 관심은 현재 진행 중인 조선왕조의궤 환수운동과 맞닿아 있다. 그는 최근 불교계를 중심으로 한 문화재 되찾기에 앞장서왔다. 거둔 성과도 크다. 일제가 오대산 사고(史庫)에서 가져간 조선왕조실록은 2006년 도쿄대가 서울대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돌아왔다.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있던 북관대첩비도 2005년 돌려받았다. 본래 함경도에 있었던 북관대첩비는 남한을 거쳐 현재 북한에 인도돼 있다. 그는 올 5월에도 평양을 방문해 의궤 환수 운동에 대한 견해를 나누고 돌아왔다. 현재 일본에는 명성황후의 장례 과정을 기록한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를 비롯한 72종의 의궤, 즉 조선왕조의 주요 행사 기록물이 일본 왕실의 도서관 격인 궁내청 서릉부에 있다. 이 역시 실록과 함께 일제가 오대산 사고에서 가져간 것이다.

좀체 열람이 쉽지 않다는 서릉부를 비롯, 그는 그동안 발품을 팔아 일본 내 여러 사료를 직접 확인했다. 이른바 ‘명성황후 능욕설’의 바탕이 된 ‘에이조 문서’를 비롯해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있는 ‘조선왕비사건 관계 자료’를 영인본 형태의 원문으로 이번 책에 수록한 것도 이런 결과다. 후쿠오카의 구시다 신사에 보관 중인 히젠도(肥前刀), 즉 명성황후를 죽일 때 쓰인 것으로 전해지는 칼 역시 3년 전 눈으로 보고 왔다. “사건에 가담했던 도 가쓰아키가 이 칼을 기증한 내역을 적은 서류도 있습니다. ‘왕비를 이 칼로 베었다’는 구절이 있더군요. 칼집에는 ‘一瞬電光刺老狐’(늙은 여우를 단칼에 찌르다)라고 쓰여 있고요. 16세기 이름난 장인이 만든 명검입니다. 이런 칼을 들고 갔다는 건 도가 왕비를 죽일 준비를 하고 갔다는 것이지요.”

을미사변, 독립운동의 시작
그가 문화재 환수 운동에 나서는 데는 2004년 교토의 고서점에서 산 책 한 권이 계기가 됐다. 도쿄대 교수가 쓴 『청구사초』를 보고 실록이 도쿄대에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국내 연구자 중 아는 이가 없지는 않았을 터. “우리 내부의 패배주의도 문제입니다. 한국에 돌아와 관련 기관들과 얘기를 하니까 다들 ‘돌려받을 수 있겠느냐’는 반응이었어요. 실록 환수을 위해 일본을 11번 다녀왔습니다. 도쿄대가 당시 일제총독부에서 실록을 얻은 과정을 자랑한 인터뷰 기사 내용도 찾아서 가져갔죠. 문화재를 돌려받으려면 약탈된 것이라는 유통 경로를 입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는 일본 궁내청의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에서도 ‘대정 11년 조선총독부 기증’이라는 붉은 도장을 확인했다. 일본 정부와 왕실을 상대로 국내 법원에 관련 소송도 제기해 둔 상태다. “우리 정부가 일왕의 방한을 추진하고 있잖아요. 한·일 관계의 미래를 제대로 풀어나가려면 지난 역사에 대한 사과만이 아니라 의궤 환수 같은 일이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문화재 되찾기로 시작한 그의 명성황후에 대한 관심은 다양한 사료를 확인하며 한결 깊어진 듯했다. 역사와 상상을 뒤섞은 팩션을 쓸 계획도 넌지시 비췄다. “명성황후가 한결 자유롭게 정치를 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물론 가장 좋은 것은 대원군과 힘을 합쳐 외세에 맞서는 것이었겠지만요.”



의궤(儀軌) 조선시대 왕실·국가의 주요행사 내용을 담은 기록물. 혼례·장례·세자책봉·외국사신의 영접 등 행사를 주관하는 기관에서 이를 만들었다. 의궤는 통상 하나가 아닌 복수로 만든다. 2006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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