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사가 주는 혜택이냐, 소비자가 찾을 권리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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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호 20면

직장인 양모(35)씨는 지난해 7월 신용카드로 자동차를 샀다. ‘세이브 포인트’를 활용해 30만원을 할인받았다. 그러나 할인은 거저가 아니었다. 미리 할인을 받는 대신 해당 카드를 써서 포인트를 쌓아야 했다. 30만원을 할인받은 뒤 상환기간인 1년 동안 그가 카드로 써야 할 돈은 1500만원. 사용액의 평균 2%가 포인트로 쌓이는 것을 바탕으로 계산한 금액이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올 7월, 그가 이제껏 쌓은 포인트는 3만원에 해당하는 3만 점에 불과했다. 다른 카드와 번갈아 쓰느라 해당 카드 포인트를 집중적으로 쌓지 못한 것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27만원을 카드사에 돌려줘야 했다. 미리 할인받은 30만원에서 포인트로 쌓은 3만원을 제외한 돈이다.
 
카드사 경쟁 치열해 포인트제 발달
‘세이브 포인트’제도를 카드사 등은 흔히 ‘선(先)할인을 받을 수 있다’는 식의 말로 홍보하고 있다. 이런 표현에 대해 금융감독원은 이미 2007년 초 제동을 걸었다. 광고에 ‘신차구입 시 OO만원 선할인’이라는 문구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미리 지급한 포인트는 엄연히 나중에 갚아야 하는 빚”이라며 “할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소비자가 나중에 갚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할인 ‘혜택’이 아니라 일종의 채무라는 얘기다.

포인트 잔액, 작년에만 1400억원어치 소멸

‘세이브 포인트’는 요즘 카드사 대부분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서비스다. 포인트 제도는 사용액에 따라 포인트를 먼저 쌓은 뒤 나중에 이를 사용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세이브 포인트는 이 순서를 바꾼 것이다. 이를 비롯, 국내 카드사들은 거의 예외 없이 저마다 이름을 붙여 이런저런 포인트 제도를 운용 중이다. 단국대 이보우(경영대학원 신용카드학과) 교수는 “국내는 각종 포인트 제도가 해외에 비해 크게 발달해 있다”
며 “카드사끼리의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경제활동 인구 1인당 발급된 카드는 4장에 달한다. 미국(5.3장)에 이어 세계 2위 수준이다. 더구나 신용카드는 여타 제품과 달리 차별화가 쉽지 않다. 국내 카드사가 소비자의 사용실적을 높일 유인책으로 포인트 제도를 널리 도입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라는 것이다.

소비자 역시 포인트 제도에 관심이 많다. 신용카드 가입 때 중시하는 요소로 ‘연회비 유무’(21.7%)에 이어 ‘포인트 적립’(15.5%)을 꼽은 설문결과도 있다. 이는 2005년 단국대 신용카드금융연구소가 실시한 조사다. 이 설문에서 응답자들은 선호하는 부가서비스로도 ‘주유 할인’(15.5%)과 ‘포인트 제도’(15.4%)를 가장 많이 꼽았다.

정작 포인트를 쓰는 비율은 그다지 높지 않다. 지난해까지 국내 카드사에 소비자가 쌓은 포인트는 돈으로 환산하면 1조5000억원이 넘는다. 반면 연간 사용한 포인트는 9800억원에 그쳤다. 포인트를 쓰지 않고 잠재워 두는 소비자가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포인트를 적극적으로 쓰려는 소비자 역시 예상치 못한 난관을 겪곤 한다. 직장인 김모(38)씨가 이런 경우다. 김씨는 2005년 현대카드에 가입했다. 자동차를 수리할 때 포인트를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다는 요지의 광고에 이끌렸다.

2년 뒤 김씨는 그동안 쌓은 포인트 20만 점으로 타이어를 교체하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카드사의 답변은 “제휴사인 현대모비스가 타이어를 만들지 않기 때문에 포인트를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카드사는 김씨에게 “제휴사의 순정제품에 한해 포인트를 쓸 수 있다”며 “이 같은 내용이 홈페이지·약관에 적혀 있다”고 했다. “이를 충분히 숙지하지 않은 소비자 책임”이라는 주장이다. 반면 김씨는 “포인트를 제휴사의 순정제품에만 쓸 수 있다고 공지받은 적이 없다”면서 “광고를 보고 현대 모비스센터를 통해 모든 수리가 가능한 줄 알았는데, 홈페이지 구석에 있는 내용을 못 봤다고 소비자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무리”라고 주장했다.
 
정부 규제법안 업계 반발로 무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홈페이지보다도 약관이다. 약관에 나와있는 내용을 소비자들이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경우 불만을 제기해도 구제받기 힘들다. 카드사들은 포인트 관련 분쟁의 상당 부분에 "약관에 나와 있다"고 대응한다. 문제는 약관을 꼼꼼히 살피는 소비자가 적다는 점이다. 다른 문제는 카드사들이 약관 내용을 자주 바꾼다는 점이다. 일부 포인트 혜택을 슬그머니 줄이거나 없애기도 한다.

그동안 과도한 혜택으로 수익성이 악화됐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우곤 한다. 예컨대 삼성카드는 소비자의 전달 카드 사용실적이 10만원 이상이면 제휴주유소에서 주유할 때 1ℓ에 40포인트를 적립해 줬다. 이를 올 4월부터 축소했다. 직전 3개월간 월평균 30만원 이상을 써야 포인트 적립을 받을 수 있도록 바꾼 것이다. 국민카드는 5월부터 포인트 적립률을 축소했다. 신용카드는 사용액의 0.2%에서 0.1%로, 체크카드는 0.5%에서 0.2%로 각각 줄였다.

정부는 이 같은 관행에 제동을 걸기 위해 올 4월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에 관련 내용을 포함시켜 입법예고한 바 있다. 일정 규모 이상의 포인트나 마일리지를 발행하는 업체는 금융감독위원회에 의무적으로 등록하도록 해 감독을 강화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과도한 규제'라는 관련 업체들의 반발과 총리실 규제개혁위원회의 철회 권고로 없던 일이 됐다. 시민단체들은 여전히 제도개선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포인트나 마일리지가 사업자의 수익창출 수단으로 널리 쓰이는 반면 소비자의 혜택은 미미하다'며 관리감독 강화를 요구하고 있다.

포인트와 관련, 소비자가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유효기간이다. 현재 카드사들은 포인트에 대부분 5년의 유효기간을 두고 있다. 이 기간이 지나면 포인트는 자동으로 없어진다. 이처럼 소멸되는 포인트를 돈으로 환산하면 매년 1000억원이 넘는다. 포인트의 자동소멸을 줄이는 대책이 나와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이유다. 한국소비자연맹 강난숙 부회장은 “젊은층은 포인트 활용법을 잘 알고 있는 편이지만 중·장년층은 잘 몰라서 포인트를 버리는 경우가 많다”며 “기업에서 포인트 제도를 쓰기 쉽게 바꾸고 적극 홍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포인트에 유효기간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소비자도 적지 않다. 한국소비자원에 접수된 카드 포인트 관련 불만의 상당 부분이 이런 내용이다. 한국소비자원 백승실 서비스 팀장은 “약관을 꼼꼼하게 확인하지 않은 소비자와 적극적으로 고지하지 않는 카드사 모두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한신대 이건범(경영학과) 교수는 “소비자 보호 차원에서 약관과 관련한 내용은 널리 알려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며 “감독기관·소비자보호단체 등이 카드사 감독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카드사들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삼성카드 홍보팀 이윤동 차장은 “고지서·e-메일·휴대전화 문자 등 연락 가능한 모든 수단으로 포인트 소멸 3개월 전에 알리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카드 관계자도 “과거와 달리 요즘은 카드사도 포인트 활용을 적극 권장하고 사용방법을 광고로 홍보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이런 주장대로라면, 기왕에 주어진 혜택을 제대로 찾아 쓰는 것은 소비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단국대 이보우 교수는 “포인트는 혜택이 아니라 소비자로서 반드시 찾아야 할 권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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