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셰프 3인 “나의 요리 인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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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브스코리아셰프는 단순히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창의성을 발휘해 최고의 요리를 만들어야 할 뿐만 아니라 주방 스태프와 고객까지 관리해야 한다. 끊임없이 변하는 음식문화 트렌드를 파악하고 자신의 브랜드도 높여야 한다. 세계적인 요리사 알랭 뒤카스는 <미식의 테크놀러지>라는 책에서 ‘나는 레스토랑을 움직이는 무대감독’이라고 소개했다. 포브스코리아는 최근 주목받고 있는 셰프 3인을 만나 성공 비결을 들었다. 특급호텔 총주방장부터 청담동 오너 셰프, 아이돌 요리사 등 나이와 경력, 철학은 달랐지만 요리에 대한 ‘열정’은 매한가지였다.

박효남 밀레니엄 힐튼 총주방장
“고객보다 눈높이 높아야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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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이었다. 박효남 주방장은 자신이 만든 뷔야베스(프랑스식 해물탕)가 고객에게 퇴짜를 맞고 주방으로 돌아온 것을 알았다. 그는 ‘재료가 잘못됐나’라는 생각에 다시 요리를 만들어 웨이터에게 보냈다.

반응은 여전히 싸늘했다. 그의 요리는 고스란히 주방으로 되돌아왔다. 박 주방장은 손님을 찾아가 이유를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단순했다. ‘간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멍한 느낌이었습니다. 제 입맛에 맞춰 간을 했지, 고객에 따라 입맛이 다르다는 것을 그때까진 무시했던 거죠.”그는 이때부터 레스토랑을 찾는 손님들의 입맛과 식성을 수첩에 꼼꼼하게 옮겨 적었다.

손님들이 다시 올 때 그 맛을 찾아 주기 위해서다. ‘저 사람은 소식하는 분, 이분은 크림수프를 좋아하지 않고…’. 그의 고객 감동 경영은 서울의 미식가를 하나 둘씩 단골로 사로잡았다.

박효남 상무는 지금이야 국내 스타 셰프의 원조로 불리지만 시작이 순탄치는 않았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유복했던 가정이 위기를 맞자 그는 근처 요리학원에 등록했다. “저야 요리가 좋아서 시작했지만 다른 남자 수강생들은 학원에 들어올 때 주위를 둘러봤어요. 남자에게 요리사라는 직업이 부끄러웠던 거죠.”

78년 하얏트 호텔 조리 보조로 주방에 들어서면서 그의 눈물겨운 노력은 시작됐다. 초보자 전담인 감자 깎기를 잘하기 위해 잠들 때도 계란을 감자라고 생각하며 손에 쥐고 수없이 깎는 연습을 했다. 경력 8년이 넘어야 오른다는 퍼스트쿡에 5년 만에 올랐다. 밤 12시에 퇴근했지만 방송통신고에 입학해 만학도의 꿈을 이루고, 영어 회화 학원을 다니며 특급호텔 주방장을 향한 미래를 준비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83년 힐튼 호텔이 문을 열자 그 호텔 프랑스 레스토랑 시즌스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이때부터 ‘최연소’란 수식어가 줄곧 따라다녔다. 99년엔 38세의 나이로 업계 최연소 임원이 됐다. 2001년엔 외국인 주방장들이 독차지했던 특급체인호텔 총주방장 자리에 한국인 최초로 임명됐다.

독일 루프트한자 항공이 퍼스트·비즈리에 클래스 승객을 대상으로 선보이는 ‘스타 셰프’ 행사에도 한국인 주방장으로는 최초로 초청됐다. 그는 임원(상무)이지만 아직도 주방에서 직접 메뉴를 개발하고 손수 음식을 만들어 손님을 맞는다. 그의 주도로 시즌스는 1년에 네 번 메뉴가 싹 바뀐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그의 고집 때문이다.

그는 “요리사 중엔 고집불통이 많다”며 웃었다. 그는 “총주방장이라도 실력이 있어야 후배들이 따르는 시대”라며 “요즘은 해외에서 공부하고 온 후배가 많아 더 긴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프랑스 손맛으로 유명한 그지만 평소엔 된장찌개와 김치를 즐기는 토종 입맛을 자랑한다. 그는 “한식을 수출하는 것보다는 우리의 식문화를 알리는 게 급선무”라는 입장이다.

얼마 전 유럽 출장 길에 겪은 경험담도 끄집어냈다. 당시 박 상무가 이용한 외국 항공기는 식사 때마다 김치를 제공했다. 점심 시간에 대부분 외국인 승객들이 김치를 먹는 것을 보고 내심 흐뭇해졌다. 하지만 저녁 시간엔 외국인 승객들이 김치에 손도 대지 않았다. “점심엔 김치가 샐러드인 줄 알고 먹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죠. 메인 음식과 함께 김치를 곁들여 먹는 우리 식문화를 알았다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박 상무는 최근 연세대에서 진행되는 한식 스타 셰프(Star Chef) 양성 과정인 ‘최고위 조리장 교육프로그램’에 원서를 내밀었다. 이 과정은 농림수산식품부가 한식 세계화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다. 박 상무는 “한식 세계화에 일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어윤권 구르메 에오 오너 셰프
“오늘은 어제보다 좋은 요리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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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미진 골목의 건물 3층에 테이블은 달랑 4개인 이탈리아 레스토랑.’4년 전 청담동 뒷골목에 ‘리스토란테 에오’가 들어설 때만 해도 지금처럼 잘되리라 예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변변한 간판 하나 없이 메뉴는 점심 한 가지, 저녁 두 가지 코스가 전부였다. 가격도 점심 코스는 3만3000원, 저녁은 6만6000원과 8만8000원으로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입소문을 타면서 예약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CEO들과 미식가들은 어떻게든 예약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야 하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에오(eo)는 어윤권 셰프의 영문 성이다. 그는 국내 오너 셰프의 원조로 불린다. 그는 “처음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수산시장에서 장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하는 친구니까 밀어주자’는 스폰서가 많았기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어 셰프를 만난 곳은 최근 확장 이전한 2층 규모의 ‘구르메 에오’에서다. 그는 인터뷰 내내 요리사를 ‘기술자’라고 불렀다. 그는 ‘투자가 겸 기술자’인 셈이다. 그는 “레스토랑은 투자가와 기술자의 손발이 맞아야 성공한다”며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너 셰프 레스토랑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설명했다.

오너 셰프들은 대부분 5~10개 테이블의 부티크 레스토랑을 지향한다. 그래서 개별 손님을 위한 맞춤식 요리도 가능하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운영하기 때문에 재료와 식기를 아끼지 않는다. 리스토란테 에오에선 참치를 제외하고는 냉동 재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생선은 양식이 아닌 자연산만 취급한다.

그래서 생선 가게에 가도 갑이 아니라 을이다. “자연산을 싸게 달라고 부탁하는 처지니까요. 자동차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처럼 매일 비용에 대해 고민하지만 품질을 생각하면 포기할 순 없어요.” 신라호텔 주방에서 일을 시작한 어 셰프는 세종호텔, 홀리데이인, 힐튼호텔을 거쳐 97년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이탈리아 요리를 하다 보니 직접 그 나라의 요리를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현지에선 플라미니오, 세르볼라, 라파체 등 유명 레스토랑을 거쳐 포시즌 호텔의 부주방장까지 올랐다. 그는 “우리와 너무 다른 환경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고 돌이켰다. 현지 주방은 한국과 달리 스승도 없고 존칭도 사용하지 않았다.

“주방장에 대한 존경은 존칭이나 예절에서 나오는 게 아니더군요. 주방장은 스승으로서 군림하거나 대접받으려 하지 않았어요. 묵묵히 일하면서 자신의 기술을 하나씩 전수해 줍니다. 후배가 먼저 떠나면 자신의 옷에 직접 사인을 해서 건네줍니다. 이를 받은 후배는 눈물을 펑펑 흘리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예의입니다.”

시련도 많았다. 2000년 한국으로 들어와 한 레스토랑의 셰프로 근무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레스토랑은 문을 닫았다. “전적으로 제 잘못이었습니다. 자신감과 오만에 빠져 있었던 거죠. 전 최고의 요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손님들은 계속 뭔가 부족하다고 했죠. 당시만 해도 그 차이를 몰랐습니다.”

결국 이탈리아로 다시 떠났다. 하루는 한 주방 동료가 굴을 까고 있는 것을 지켜봤다. 한국에선 30초면 끝날 일을 2~3분이나 씨름하고 있는 것을 보고 답답해졌다. 눈치를 챘는지 그 동료는 어 셰프에게 굴을 까 보라고 부탁했다. 그는 순식간에 굴 하나를 까고 의기양양했다.

하지만 상대의 반응은 오히려 차가웠다. ‘우리 레스토랑은 굴 5개를 50달러에 팔고 있는데 누가 그 돈을 지불하고 당신이 깐 굴을 사 먹겠느냐’는 거였다. “제가 깐 굴을 보니 흠집이 많았어요. 그래서 흠집이 나지 않게 다시 까 봤는데 5분도 넘게 걸리는 겁니다. 부족했던 것이 바로 디테일이었던 거죠.”

현재 에오의 주 고객은 40대 이상이다. 그는 “한국의 40~60대야말로 진정한 트렌드 세터”라며 “젊은 층에 비해 경험이 풍부하고 새로운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적다”고 말했다.

미식에 대한 수요도 늘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는 “에오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미식에 대한 수요는 한국도 일본 못지않다”며 “미식 수준도 거의 차이가 없다”고 강조했다. 요리에 대한 그의 철학은 “오늘은 어제보다 나은 요리를 만드는 것”이다. 그는 “에오라는 브랜드로 더 많은 레스토랑을 만들어 좋은 후배들을 양성하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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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 정식당 셰프
취사병 출신…지금은‘압구정 아이돌’

‘정식당’은 오너 셰프인 임정식 씨의 이름이다. 임 셰프는 업계에선 ‘압구정 아이돌 셰프’로 불린다. 앳된 얼굴의 31세 요리사지만 경력은 예사롭지 않다. 임 셰프가 처음 요리를 배운 곳은 군대다.

“갑자기 취사병으로 차출돼 요리라는 것을 해 봤어요. 맛을 본 장교가 ‘소질이 있다’며 요리사로 나가 보라고 했죠.” 군대를 제대한 그는 여러 식당을 전전하며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다 2006년 세계 3대 요리학교 중 하나인 미국 ‘CIA(The Culinary Institute of America)’에 원서를 내밀었다. “일하고 있던 떡집이 부도가 나고 사기까지 당하며 한동안 방황을 했죠. 그러다 제대로 요리를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CIA를 졸업한 그는 이후 미국과 유럽의 유명 레스토랑들을 돌면서 스타주(stage·인턴) 생활을 시작했다. 뉴욕 불리(Bouley)와 스페인 아케라레(Akelare) 등 유명 레스토랑들이 대부분이다. “짧게는 한 달에서 3개월 이상 일한 레스토랑도 있습니다.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일해 보기도 하고 스페인, 이탈리아, 스칸디나비아 쪽 식당에서도 일해 봤어요. 여러 곳을 전전하며 배운 것은 요리에 있어선 제한이 없다는 겁니다. 어머니에게만 배운 요리로 미슐랭 스타를 받은 레스토랑도 봤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지난 2월 테이블 6개를 갖춘 정식당을 열었다. 간판엔 상호와 함께 ‘뉴 코리안(New Korean)’을 새겼다. 그는 “한식만큼 무한대로 도전할 수 있는 영역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처음엔 블로그를 통해 입소문이 퍼지더니 지금은 입맛 까다로운 대기업 오너도 여럿 단골이다.

정식당의 메뉴는 점심·저녁 코스 한 가지다. 이름은 앨범처럼 ‘1집’, ‘2집’ 등을 붙였다. 최근엔 3집을 내놓았다. 임 대표는 “메뉴가 두 달마다 바뀌며, 바뀔 때마다 일련번호를 붙인다”고 설명했다. 세트는 하나지만 메뉴 구성은 단순하지가 않다. 머루를 넣어 만든 푸아그라 무스, 청양고추와 타피오카를 넣은 초록색의 아귀 매운탕, 미역소스와 깍두기를 곁들인 파에야(스페인식 볶음밥), 명이나물에 싸먹는 오감만족 돼지보쌈 등.

“레스토랑으로 돈을 벌고 살아남기 위해선 남들과 달라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해 봤지만 한국처럼 식재료가 다양한 나라가 없었어요. 음식점만 해도 순대국밥집, 보쌈집 등 이렇게 세분된 곳이 없죠. 철마다 제철 요리도 따로 있고. 정말 다양성 면에 있어서는 최고인 것 같아요.”

임 대표는 내년엔 미국 뉴욕에 정식당을 열 계획이다. 그는 “뉴욕에서 새로운 한식이 무엇인지 보여 주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글 손용석 기자·사진 김현동 기자, 오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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