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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cover story] 소싸움 4대 하정씨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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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와 함께 있으면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가 된다. 싸움소가 내뿜는 거친 숨소리만 들어도 서로의 심정을 헤아릴 정도다. 그들의 소 사랑이 크다한들 부자지간의 정과 비교할 수 있을까.

"아참 아부지, 좀더 바짝 잡아당기세요."

"이눔아, 우격다짐으로 황소 고집을 어떻게 당하겠다는 거냐. 이렇게 등을 두드려 가며 살살 달래야지…."

소싸움의 본고장 경남 의령에서 3대째 소싸움꾼의 대를 잇고 있는 하의효(70)씨. 아들 앞에서 왕년의 솜씨를 뽐내보지만 잔뜩 성이 나 가쁜 숨을 몰아쉬는 젊은 수소를 다루기에는 이제 힘이 부친다. 막내 아들 정(31)씨는 그런 아버지가 안쓰러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지만 소싸움에 대해 배워야할 것이 아직 많은지라 아버지를 편히 쉬게 할 수가 없다. 아들 말을 듣고 가만히 앉아있을 아버지도 아니다. 평생 소와 함께 살아온 하씨 고집 아닌가.

"소싸움에는 좋은 소를 고르는 눈썰미가 제일 중요한거야. 눈은 둥글고 작아야 하고 뿔이 선 각이 크고 뿔 사이가 좁으며 귀가 작고 뿔 밑에 바로 붙어있고 허리는 길고 다리는 짧으며 앞쪽이 뒤쪽보다 높은 사자 형상을 갖춰야 하는 거지."

이렇게 까다롭게 골라 조련한 싸움소 '범이(7년생.1000㎏)'는 의령은 물론 진주.창령.청도 등지에서 열린 각종 소싸움 대회에서 50승 이상을 기록하며 우승을 휩쓴 전국 챔피언이다. '범이'를 빼고는 전국에서 적수가 없는 '꺽쇠(6년생.1200㎏)도 우승 경력으로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들 두 소가 벌어들이는 상금만도 연간 8000만원에 이른다. 하씨가 가진 50마지기 논에서 나오는 수입의 두배다.

"돈이 문제가 아니야. 소싸움 대회에서 우리 소가 우승할 때의 기분은 내가 의령 군의원에 당선됐을 때보다 훨씬 좋더라구."

하씨는 1991년 군의원 당선으로 잠시 품었던 정치의 일장춘몽을 도의원 낙선 뒤 바로 접었다. 그가 가야 할 길은 가업이나 다름없는 소싸움이었다. 그의 선친 역시 한국전쟁 당시 머리 위로 대포알이 날아다녀도 기르던 싸움소를 지키기 위해 피난도 가지 않고 홀로 고향에 남았을 정도의 타고난 소싸움꾼이었다.

"힘쓰라고 소한테 뱀장어나 개고기 등을 고아 먹이기도 한다지만 너는 절대 그러지 말아라. 그건 결국 소를 못 쓰게 만드는 일이야. 광우병도 다 그래서 나온 거지."

"소에게 가장 좋은 보약은 풀"이라는 게 하씨의 지론이다. 부드러운 풀과 억센 풀을 골고루 섞어 콩.보리 등과 함께 끓인 쇠죽을 먹인다. 소 한마리가 먹는 쇠죽은 하루 60㎏. 하씨가 기르는 싸움소가 모두 12마리니 하루에 700~800㎏의 쇠죽을 끓여야 한다. 그것은 고스란히 아들의 몫이다. 싸움소를 이끌고 온종일 들판을 뛰어다니며 지구력을 키우는 훈련을 도맡아 하는 것도 아들이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이 못마땅하면서도 고맙다.

"소싸움판 말고 좀더 폼나는 데서 놀아보라고 대학까지 가르쳤는데…."

하지만 소 사랑에 장가도 미루고 있는 아들 생각은 다르다. 아들은 "소와 함께 지내면서 서로 눈을 맞추며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조련 방법"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잊지 못한다.

"뿔로 나무를 들이받으며 싸움소로서의 본능을 키우다가도 다가가면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며 반갑게 맞는 놈들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이런 아들에게 좀더 선진화한 소씨름판을 물려주고 싶은 게 아버지의 바람이다. 하씨는 지방마다 다른 소싸움 규칙을 통일하기 위해 96년 전국투우연합회를 창설했다. 이와 함께 의령에 상설 소싸움장을 만들어 소싸움을 정례화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다른 지방의 소싸움군들이 1억2000만~1억3000만원을 줄 테니 '범이'나 '꺽쇠'를 팔라고 해요. 하지만 못 팔지. 의령에 만들어진 상설 소싸움장에서 그놈들이 첫 우승을 해야 할 테니까."

그것은 4대째 소싸움의 대를 이어갈 아들 정씨의 소망이기도 하다.

글=이훈범 기자<cielbleu@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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