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 윗목에 희망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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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국제통화기금 (IMF) 사태 이후 국민들이 피부로 느껴왔던 사회의 양극화 현상이 정부의 공식통계로 뚜렷이 입증되고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 12일 소득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지난해 사상 최고치인 0.3157을 기록했다고 밝혔다.도시근로자 가구의 처분가능 소득도 상위 20% 계층은 1.2% 감소한 반면 최하위 20% 계층은 19.3%나 감소해 양극화가 심화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통계청의 통계도 사회의 양극화 및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명확히 나타내 주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최상위 20% 소득계층이 전체 소득에서 차지한 몫은 39.8%인데 비해 최하위 20% 계층이 차지한 몫은 7.4%였다.

97년의 경우 그 소득점유율이 최상위층 37.2%, 최하위 8.3%였던 것과 비교하면 양극화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됐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양극화 및 부익부 빈익빈 현상으로 뚜렷해진 것이 중산층의 감소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지난 한햇동안에만 약 30만명의 중산층이 저소득층으로 추락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통계는 새삼 들먹여 무엇하랴. 정부의 통계가 아니더라도 서민들은 나날의 실생활을 통해 양극화와 부익부 빈익빈상을 체감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새 아파트에 청약열풍이 불고 주식값은 마구 치솟는다지만 달동네나 서민상대 업소의 경기는 지난해 얼어붙은 그대로다.

정부는 아랫목이 뜨뜻해지기 시작했으니 이제 윗목으로 열기가 전해질 거라며 참고 기다리라지만 그것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정부의 통계에서도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양극화 현상은 다시 말해 아랫목과 윗목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랫목이 아무리 쩔쩔 끓어도 윗목은 여전히 냉골일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기대가 있어 참고 기다리겠는가.

지금 세계에서 가장 행복해 하는 나라는 미국이다.

소련 등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람보가 되어 세계를 주무르고 있다.

미국 국민들의 경제적 만족도도 그 어느 때보다 높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미국인데도 그 소득분배구조를 보면 적어도 통계상으로는 우리보다 결코 낫지가 않다.

소득점유율이 우리의 경우는 최상위층 20%가 37.2%인데 비해 미국은 50%나 되고 최하위층 20%의 소득점유율도 우리는 8.3%인데 비해 미국은 3.7%에 지나지 않는다.

양극화 및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우리보다 더 심한 것이다.

이 현상은 갈수록 심화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미국의 국부 (國富)가 워낙 커서 그렇지 사회정의나 복지적 측면에서는 '서구 최악의 나라' 라는 세평이 조금도 틀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미국이 불경기때마다, 구조조정이 필요할 때마다 과감한 휴.폐업과 인력감축을 할 수 있는 것은 기초생활은 보장해 주는 최소한의 사회안전망만은 갖추고 있고 재취업 등 재기의 기회를 마련해줘 왔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우리 사회는 그런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조차 없다.

또 우리 사회는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다.

한번 잘리면, 한번 사업이 망하면 그걸로 끝장이다.

잘린 사람이 다시 잘 되는 걸, 망했던 기업이 다시 흥하는 걸 본 기억이 있는가.

이 시대에 와서도 합법적인 절차를 지키지 않는 파업에 선뜻 찬동할 수는 없지만 패자부활전의 길이 전혀 없는 우리 사회의 구조를 생각하면 노동자들의 극한적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다.

정부는 언젠가는 윗목에도 불기가 갈 것이라는 보장을 해줘야 한다.

패자부활전이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큰 마찰이 없이 구조조정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여당이 스스로 당안으로 지난해 국회에 제출했던, 저소득층과 실직자에게 최저생계를 보장해주는 국민 기초생활보장법은 계속 잠만 자고 있다.

그러면서 노임뿌리기식, 언 발에 오줌누기식의 공공근로자사업만 확대하고 있으니 막대한 재정을 쓰면서도 정치적 선심공세가 아니냐는 의심만 사게 된다.

예산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올해 종합실업대책예산 16조원, 공공근로자사업 예산이 2조5천5백억원인데 생활보장법의 재정으로 필요해지는 예산이 1조5천억원 안팎이어서 문제는 정책의지에 있지 예산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회안전망은 아랫목과 윗목을 연결해주는 다리다.

사회안전망이 없이는 아랫목이 아무리 펄펄 끓어도 윗목에는 냉기와 절망의 한숨만이 감돌 뿐이다.

유승삼 중앙M&B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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