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코드] 6. 수학의 태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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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에는 숫자가 없다. 혼돈에서 암흑과 밤이 생길 때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아무런 이야기가 없다.

우주의 첫 패권자인 우라노스와 그의 아들 크로노스의 통치 기간은 얼마나 길었는지에 대해서도 정보가 없다. 제우스가 티탄들과 치른 전쟁이나 거인들과 벌인 전쟁은 9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전하지만 이때의 9년이란 실제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긴 세월이란 뜻으로 쓰인 것이다.

▶ 피타고라스의 고향인 사모스 섬 피타고리온 항구에는 피타고라스 동상이 우뚝 서서 이곳을 드나드는 배들을 맞고 있다. 동상의 삼각형 조형물에는 피타고라스의 정리 같은 수학적 기호들이 새겨져 있다.

▶ 항구 뒤편 광장에 자리 잡은 피타고라스 흉상.

또 부모의 부부싸움에 끼어들었다가 제우스에게 던짐을 당한 헤파이스토스가 올림포스에서 땅으로 9일 동안 떨어졌다고 하는 것도 한참 떨어졌다는 표현에 불과하다.

영웅 역시 숫자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간다.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들었을 때 잠을 자고 새벽이 돌아왔을 때 잠에서 깬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삶은 이와는 판이하다. 모든 것이 숫자로 가득한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오전 9시 출근해 오후 5시 퇴근하고 정확한 시각을 정해 사람들과 만난다.

거리도 몇㎞라고 정확한 숫자로 표현하고, 달리는 속도도 숫자로 표시된다.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76.5세이고, 국민 소득은 일인당 1만달러가 넘는다.

모든 사람에게는 주민등록번호가 주어지고 이것에 의해 자신의 신분을 보장받는다. 심지어 아름다움까지 팔등신이란 수학적 개념으로 파악하고 사람의 능력도 연봉 액수로 따진다.

우리 주변의 숫자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태양과 지구의 거리, 각 행성들의 궤도, 가장 가까운 은하까지의 거리 같은 천문학적 지식은 물론 꽃잎의 배열까지 수학이 안 스며드는 곳이 없다. 과학의 시대인 오늘날 아무것도 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이 언제부터 수 개념을 생각해 냈는지는 알 수 없다. 처음에는 가축의 수를 센다든가 날짜가 가는 것을 헤아리기 위한 실용적 목적에서 생각해 냈을 것이다.

농사를 지을 때 반드시 필요한 천문 관찰이나 달력의 제정, 토지 측량, 교역이나 분배.과세 같은 고도로 발달된 경제행위는 수 개념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이처럼 수의 실용성은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그런 실용적 수단으로써의 수를 순수한 학문인 수학으로 발전시킨 사람은 피타고라스(기원전 570년~496년)였다. 그는 수를 만물을 설명하는 기본 원리라고 보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가장 적절한 상태와 이상적인 비율이 있다. 우리의 몸에는 더운 것과 찬 것, 마른 것과 젖은 것과 같은 여러 요소가 있는데 이들 요소가 올바른 수학적 비율에 놓여 있을 때 건강한 반면 이 비율이 깨졌을 때는 병에 걸린다.

또 소리는 일정한 진동수를 가지고 있는데 그 소리들 사이에 올바른 수학적 비율이 있으면 아름다운 음악이 되지만 이 비율이 깨지면 소음이 된다.

이와 같이 피타고라스는 모든 사물에 수학적 구조가 있다고 보고 우주의 원리를 밝히는 일은 이 수학적 구조를 밝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수는 우주의 궁극적 요소로 그 자체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다른 사물에 형식을 부여하고 규정한다. 3이란 숫자는 사람이든 사과든 그 무엇이든 그것이 세 개체가 있음을 표시할 뿐 자신은 어떤 사물을 가리키는지에 대해 무관하다.

철학적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한다면 수는 사물에 형상을 부여할 뿐 질료에는 관계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수는 보편적이다. 또 수는 일정한 단위를 이루는 동시에 무한하다.

우리는 이런 수의 특성을 이용하여 어떤 사물에도 정량적 특성을 부여할 수 있을 뿐아니라 수적 관계에 의해 사물들의 사소한 차이까지 설명하는 체계를 만들 수 있다.

피타고라스의 수의 철학이 정신사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탈레스를 비롯한 밀레토스의 철학자들은 모든 것의 밑바탕이 되는 궁극적인 물질이 무엇이고, 또 이 궁극적 요소에서 다른 물질들이 어떻게 생성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집중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우주를 이루는 물질 세계를 종합적으로 설명하는 원리를 찾는 일이었고 각 사물의 특성을 이루는 차이에 대한 연구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피타고라스는 존재를 설명하는 원리는 우주의 보편성뿐 아니라 각 사물의 특수성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수 개념이 바로 이런 종합적이며 분석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해 주는 열쇠라고 보았다.

이처럼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수로 설명하게 되면서 정신은 신화적 사고를 벗어나 합리적 세계로 들어선다. 이제 우주와 자연을 비롯한 우리의 주변 세계는 수를 통해 이성의 합리적 사고 대상으로 바뀐다. 그리고 신화 대신 과학이 자연을 설명하는 원리로 등장한다.

사물의 수를 헤아리기 위해 만들어진 바빌로니아의 수학과 토지의 측량을 위한 방법이었던 이집트의 기하학은 그리스에 들어와 피타고라스에 의해 실용적 용도를 벗어나 하나의 독립된 순수 학문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이 혁명은 인류에게 우주를 정밀한 수학적-기하학적 구조로 파악하는 길을 열어 주었다.

피타고라스 이후 인류는 모든 것을 숫자로 설명하는 버릇이 생겼다. 오늘날에는 심지어 일상의 모든 것까지 숫자로 푸는 통계학이 등장해 우리 주변을 온통 숫자로 채우고 있다.

사모스= 글 유재원 (외국어대)교수
사진 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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