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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세상보기] 하류층으로 떨어진 그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자네 실직하고 중산층에서 하류층으로 떨어졌다며? 너무 낙심말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겠지.

하류층으로 전락한 사람이 어디 자네뿐인가.

현대경제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국제통화기금 (IMF) 한파 이전에는 중산층이었는데 그 원수놈의 한파 이후 하류층으로 떨어졌다고 응답한 사람이 20%나 된다네.

이 조사 결과 하류층은 전체 인구의 54.3%에 이르러 중산층 45.1%를 압도했다네. IMF 이전에는 중산층이 61.1%, 하류층이 34.6%였다는데…. 중산층이 두터워야 안정된 사회라는데 이 조사대로라면 이제 한국 사회는 안정과는 거리가 멀어지겠지?

이미 유럽에서는 빈익빈 (貧益貧) 의 추세가 이대로 간다면 상류층 20%.하류층 80%의 양극구조로 변한다는 전망이 나온 바 있지. 세계적인 과잉생산.과잉소비의 거품이 걷히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그렇게 된다네. 중산층이 무너진다는 소리를 귀따갑게 들어온 한국 사회도 이제 그 길로 접어든 것 아닐까. 80%의 인구군 (群)에 든다면 과히 억울한 것 같지는 않을텐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왜 씁쓸한 표정을 짓지?

허구 (虛構)에 가까운 통계를 비꼴 때 가끔 '통계의 마술' 이라는 표현을 쓰던데, 마음이 정 언짢으면 이거라도 믿어 보게. 흔히 소득계층을 나눌 때 전 가구주를 5등분해 제일 못사는 20%를 1분위 (分位) 라 하고 이보다 좀 나은 사람들을 2분위, 그보다 나은 계층을 3, 4, 5분위라고 하지. 그러니까 5분위는 상류층 20%야.

이 통계의 핵심은 2, 3, 4분위는 언제나 존재하고, 그들의 소득이 얼마로 줄건 사회적 계층을 따진다면 60%에 속하는 중류층이 된다는 거야. 자네도 빈곤층이 아닌 한 중류층이 될 운명이야. 이것이 5분위의 마술인데, 듣기에 좀 썰렁해?

하여간 자넨 일단 전백련 (全白聯)에 가입하고 볼 일일세. 전백련은 전국백수연합회의 약자야. 백수 (白手) 는 '아무 것도 없는 멀쩡한 건달' 이라고 사전은 설명하데. 회원은 왈 2백만, 왈 3백만명이래. 어느날 전백련 회원 하나가 지하철 매표창구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이렇게 중얼대는 걸 들었어. "부럽다 부러워. 청결한 사무실에 앉아 돈 내밀면 표 내주는구나. 외국에선 등 굽고 돋보기 쓴 할머니들이 한다.

다달이 나오는 봉급, 거기에다 건강하라고 체력단련비까지 준단다! 아, 우리 아들도 대학 나오면 지하철에 취직하라고 족쳐야지. " 앞으로 노사정위 (勞使政委)가 대오각성하면 전백련을 위한 무슨 뾰족한 대책이 나올거야. 노사정은 실업자들에게만 고통을 분담시켰거든. 무슨 얘기냐고? 노조는 파업에 돌입하고, 사용자는 구조조정을 지연시키고, 정부는 조직 간소화를 무산 (霧散) 시켰지. 거기에다 직장인들은 왜 우리 월급에서 연금을 많이 떼느냐고 덤비니, 모두 고통분담을 거부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더라도 자넨 울분을 삭여야 돼. 자네가 무슨 용기가 있다고 '못살겠다 갈아보자' 라는 구호를 외치겠나. 자네가 무슨 힘이 있다고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겠다' 고 공약할텐가.

자네는 그저 안분자족 (安分自足) 하는 수밖에 없네. 가난은 나에게는 예사로운 일이라고 생각하면 자네는 선비일세. 또 비록 한 사발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로 끼니를 때우고 비좁은 곳에 살아도 즐거워한다면 자네는 어진 사람일세. 뭐 그게 다 있는 자가 없는 자를 달래려고 지어낸 헛소리라고? 자네 단단히 약이 올랐네 그려.

그러면 이건 어떨까. 부자가 천당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데, 그렇다면 가난한 자네의 천당행은 떼어논 당상 아닌가.

이크, 자네 표정이 험악해지네 그려. 우리 추렴해서 기차여행이라도 떠나세. 시골 5일장에서 막걸리나 마시고 오지.

김성호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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