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대통령이 채찍 든 대한항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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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대한항공의 소유.경영 분리를 강력히 촉구하고 나섬으로써 대한항공의 경영혁신이 중대국면을 맞고 있다.

金대통령은 "항공업은 단순한 사기업으로 볼 수는 없다" 며 건설교통부에 대해 전문경영인체제로의 전환대책을 세우라고 강력히 지시했다.

이같은 지시내용에 대해 재계는 "대통령의 말은 법 위에 있다" 며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청와대대변인이 "사기업에 대한 간섭이 아니라 건교부에 주의를 환기시킨 것" 이라고 서둘러 해명했지만 "정부가 체면치레로 제재를 하니 아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는 대통령의 발언은 단순한 경고 이상의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법조문 이상의 힘을 갖고, 기업의 존립 여부까지 좌우하던 과거 권위주의 시절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대한항공의 오늘의 사태와 관련, 사실 대한항공 경영진들은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

국적 (國籍) 항공기의 신뢰추락과 국제항공업계에서의 따돌림은 물론 한국의 국가이미지도 크게 훼손시켰다.

대통령이 이를 질책하고 근본대책을 세우라고 관계부처에 불호령을 내리는 것도 당연하다.

개별기업의 족벌경영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경영권을 포기토록 주문한 것은 도 (度) 를 지나친 초법적 발언이라는 재계의 반응에는 우리도 공감하지만 대통령의 입에서 이같은 발언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현실상황은 이해한다.

항공업체는 일반기업과는 다르고, 한번 사고가 나면 대형참사로 이어진다.

외국에서는 참사가 났다 하면 최고경영진부터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

그러나 근년 들어 크고 작은 사고의 빈발에도 대한항공 경영진이 책임을 지고 물러난 적이 없다.

책임을 지지 않으니 개선이 안되고 이는 또 다른 사고로 이어진다.

외국 동업자들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대한항공의 경영체제가 이래서는 안되겠다' 는 인식은 이제 국민들간에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문제는 경영개혁의 방법이다.

경영진교체를 포함한 획기적 방안을 당국에 제출해 결재받는 식의 타율적 방식은 바람직하지도, 시대의 흐름과도 맞지 않는다.

화물기 추락의 원인규명과 뒷수습에 정신이 없었겠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 대통령의 발언이 있기 전에 대한항공 경영진쪽에서 자율적인 개혁조치의 표명이 있어야 했다.

전문경영인 영입을 통한 책임경영체제 확립, 조종인력의 확충과 '조종실 문화' 의 획기적 개선, 정비체계의 고도화 등은 이제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대한항공이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서둘러야 한다.

국제적 신뢰회복을 위해 외국 전문경영인 영입도 검토할 만하다고 본다.

근년의 잦은 사고와 관련, 감독소홀과 솜방망이식 징계 등 정부당국 또한 책임을 면키 어렵다.

윽박지르기보다는 자율적 개혁을 유도하고 안전운항을 위한 감시체계와 시스템강화가 정부의 할 일이다.

사기업에 대한 경영권간섭은 아무리 대한항공이란 기업의 특수성을 감안한다 해도 무리며 '이번 단 한번' 이 두고두고 나쁜 선례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당국의 신중과 자제를 요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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