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깊이읽기] 노숙자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그와 나눈 교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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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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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로페즈 지음 박산호 옮김
랜덤하우스 코리아 399쪽, 1만2000원

슬럼프에 빠진 30여년 경력의 언론인이자 로스앤젤레스(LA)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스티브 로페즈.

여느 때처럼 칼럼 소재를 찾으려 머리를 싸매던 그의 눈에 혼잡한 도심 한구석에서 누더기 옷을 입고 두 줄밖에 없는 바이올린으로 베토벤의 작품을 연주하던 나다니엘이 들어온다. 로페즈는 예감한다. 방랑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좋은 칼럼 소재가 되고 대박일 수도 있다고.

나다니엘의 궤적을 쫓던 로페즈는 그가 클리블랜드의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줄리아드 음악학교에 입학한 뒤 정신분열증이 발병해, 현재는 LA의 가장 위험한 지역에서 노숙자로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묻어둘 기자는 세상에 없다. 로페즈의 칼럼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고 독자들이 보낸 악기가 그에게 답지한다.

이 악기만 나다니엘에게 전해주고 끝났다면 이 책은 나올 수 없었다. 그렇지만 새 악기를 가지고 길거리에서 생활하는 나다니엘이 범죄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던 로페즈는 선을 넘는다.

취재 대상에 대해 일반적으로 두는 거리와 객관성에 대한 스스로의 기준을 깨기 시작한 것이다. 나다니엘이 쉼터로 터전을 옮기도록 각종 유인책을 궁리하면서 점점 나다니엘의 사회복지사로, 친구로 변모해간다.

때문에 두 사람의 만남과 교류는 얼핏 한 쪽은 주고, 다른 한쪽은 받기만 하는 관계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교류는 서로를 치유해가는 과정이었다.

로페즈는 “나다니엘은 가면을 쓰지 않고 자기 삶을 전면에 드러냈다”며 “나다니엘은 내 시선을 나의 내면으로 돌릴 수 있도록 해줬다”고 강조한다. 영혼의 만남은 상대를 일으키는 힘이 됐다. 나다니엘은 일상적인 삶을 누릴 수 있게 됐고, 로페즈도 슬럼프에서 벗어났다.

로페즈는 나다니엘이 자신의 손을 꼭 잡던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린 소위 정상적이라고 할 만한 대화를 별로 한 적이 없다. 그러나 사실 어떤 대화를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나는 그의 손을 쥐었다. 둘 다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었다.”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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