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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380.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제8장 도둑

그들이 차지한 민박집은 애당초 민물횟집을 내었다가 경쟁에도 밀리고 시절도 없어 문을 닫은 식당이었다. 남편은 외지로 나갔는지 보이지 않고, 젊은 아내 혼자서만 텅 빈 집을 지키고 있었다.

장터거리로 나갔던 승희와 태호가 횟거리와 참게를 사다가 회를 뜨고 탕을 끓였다. 벚꽃은 아직 피지도 않았는데, 향기가 문지방을 타고 넘어와 흩어질 줄 몰랐다.

주위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은 없었다. 산기슭 어딘가에 몇 그루 숨어서 핀 매화향내인 것 같았다. 밥상에 둘러앉아 참게탕을 먹다말고 태호는 가방 속을 뒤져 소주 한 병을 꺼내들며 힐끗 철규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철규가 먼저 낌새를 알아채고 빈 그릇을 찾아 훅 불면서 쑥 내밀었다. 그러나 이미 번호를 알고 있는 승희만은 달갑지 않아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소주를 따르던 태호가 엉뚱한 말을 건넸다.

"나는 내일 하동으로 가지 않고 여기서 좌판을 펴보는 게 어떻겠어요?" "여기가 쌍계사로 오르는 들머리길이니까 관광객들을 겨냥하자는 말일 텐데, 하지만 내일은 주말도 아니고 고로쇠가 나자면 아직 며칠은 이른 거 아냐? 태호 봄 타는 거야? 오늘 광양에서도 싱숭생숭해서 듣보기 장사로만 빈둥거리더니?"

"소주 한 잔에 말씀 참 거칠게 하시네요. 빈둥거린 게 아녜요. 내 딴엔 갈등이 많았단 말예요. 섬진강 주변 장터를 돌자면 아무래도 어패류를 취급해야 구색도 맞고 잇속도 차릴 수 있을 것 같아서 고막장수를 만나 애기를 나눴던 것 뿐인데…."

"갯벌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우리가 대중없이 고막장수로 대들어? 고막이 생물이란 거 알아? 못다팔면 썩는 물건이야. 근질근질 하더라도 며칠만 참고 있어봐. 오징어 자루만 끌어 안고있어도 뉘 돈을 받아 쥐어야 할지 갈등 느낄 때가 반드시 있을 거야. 평소에는 듬직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며칠을 참지 못하고 안달을 하나?"

"이상하게 자신감이 안 생겨요. 타관바람을 타는 건지…. " "타관만 떠돌며 잔뼈가 굵었단 사람이 하필이면 섬진강 봄바람에 쪽을 못쓰다니? 그거 말이나 돼? 형식이 너 나가서 소주 두병만 사갖고 올래?" "말 떨어지기 바쁘게 벌떡 일어서는 형식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긴 것을 승희였다.

"낮에 만났던 그 고막장수 얘긴데, 자기는 군대에 복무했던 기간밖에는 객지생활해본 경험이 없었다는 거예요. 게다가 장날에 장터에 잠깐 나와도 곧장 집으로 가고 싶어서 환장하겠대요. 그 말을 듣는 순간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었는데, 아까 장터거리에서 표지석을 읽고 있노라니 느닷없이 그 말이 다시 뒤통수를 치는 거예요. 난 이게 뭐지요? 장터를 찾아다니는 것밖에는 마땅히 갈 곳이 없어요. 난 평생 발붙일 곳도 없이 이 모양으로 떠돌며 살아야할 신세라는 걸 생각하니까. 등골에서 진땀이 흐르더란 말예요. "

"치사한 놈. 너 지금 울고 있냐? 형식이 앞에서 울고 있어? 멀쩡한 놈이 그래도 돼?" "네. 울고 있어요. 난 우는 것도 맘대로 못해요? 서발장대를 휘둘러도 거칠 것이 없다는 속담이 있다더니 내가 정말 그 꼴 아닙니까. 한자리에 붙어 있어 보았자 하루 아니면 이틀이 고작이죠. 내겐 비오는 날이 공치는 날도 아닙니다.

그런 날은 다른 장터로 이동을 해야 하니까요. 갑자기 지쳤다는 생각이 들어요. 깨워주지 않으면 한 일주일 동안 계속 잠만 잘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내 인생이 엉망이에요. 한자리에 진득하니 있어 봤으면 좋겠네요. 그 고막장수가 얼마나 부러운지 모르겠어요. 한평생을 이러고 살아야 한다는 게 억울하고 서럽다는 생각이 오늘 갑자기 가슴을 치네요. "

"장돌뱅이가 한 자리에 진득하니 머물고 싶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기나 해? 인생 끝장내자는 말 아녀? 한씨네 행중 판세 정말 잘 돌아 간다. "

"그때였다. 좌석 어디에선가 훌쩍하고 콧물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승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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