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 친일파가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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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80년대 서울 특파원을 지낸 한 일본기자는 귀국 후 한국의 이완용 (李完用) 을 연구할 계획을 세웠다.

하필이면 왜 이완용이냐고 했더니 대답이 걸작이었다.

"서울 특파원때 이완용에 관한 기사를 쓰기 위해 이완용 전공학자를 찾아 헤맸으나 아무도 없다고 하더라. 이유인즉 조선을 일본에 팔아 먹은 이완용을 전공하면 한국역사학자로서 체통이 안서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내가 이완용을 연구하면 1인자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

덧붙이기를 "제2의 이완용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또 다시 그런 사람이 나와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서면 어쩔 건가. 재발방지를 위해서도 한국사람들은 이완용을 더욱 철저히 연구해야 할 것 아닌가. "

그는 유창한 한국어로 한국사회의 허점을 짚어나갔다.

한국사람들이 꼭 해야 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있으니 일본사람인 자기라도 해야겠다는 것이다.

8년 전 그날의 창피함을 나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왜냐하면 바로 나 같은 사람을 포함해 '한심한 한국인들' 이라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기획원과 재무부가 나뉘어 있을 당시, 재무부는 일본에 파견하는 재무관 물색이 고민거리였다.

국제금융관계 차원에서 주일 재무관의 비중이 막중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어를 제대로 하는 인물을 재무부 안에서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국의 최고인재들이 죄다 모였다는 곳이 말이다.

결국 다른 부처에서 '일본어 가능한 자' 를 빌려다 재무관을 시키는 해프닝이 벌어졌었다.

한국의 재무장관과 일본의 대장상간의 단독요담때도 한동안 일본인 통역 혼자 양쪽을 통역했었으니 도무지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졌던 셈이다.

하기야 국립 서울대학교 같은 데서도 일본어 가르치는 것을 여태까지 거부하고 있으니. 언어문제가 이럴진대 다른 것이야 뻔한 노릇 아니겠는가.

이번 쌍끌이 어업협상도 어찌 보면 시기의 문제였지, 언젠가는 당할 망신을 당한 것 아닐까 싶다.

일본영해든, 한국영해든 바닷속에 무엇이 어떻게 돼 있는지를 이잡듯이 들여다보고 연구해 온 그들을 상대로, 얼렁뚱땅 맞상대해 그 정도로 막은 것이 도리어 우리 실력으로는 선방 (善防) 이었다고 하면 지나친 자조 (自嘲) 일까.

협상 테이블에 앉았던 직업관료에서부터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들인 어부들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그들과 우리의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엄연한 차이를, 불쾌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본 관련 '불쾌지수' 상승현상은 갈수록 더욱 심해질 걸 각오해야 한다.

일본제품의 한국상륙을 저지해 온 수입다변화정책도 내년으로 완전히 없어지고, 금기시해 왔던 일본문화 수입도 본격화를 예고하고 있다.

뿐만이 아니다.

모든 것을 개방하는 마당에 일본을 겨냥한 무작정 배척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오히려 국제통화기금 (IMF) 이 밀어붙인 시장개방의 최대 수혜자는 일본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농후하다.

안타깝게도 불쾌지수를 줄이는 유쾌한 방법은 없다.

불쾌를 무릅쓰고 상대방과의 실력차이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게 바람직하다.

미국자동차보다 일본자동차가 싸고 좋으면 일본차를 사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제품뿐 아니라 시스템이나 문화수입에도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다.

더 이상 이중적인 반일 (反日) 감정은 한국 스스로를 위해서도 이로울 게 없다.

걸핏하면 사과를 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그들의 법과 브로슈어를 무작정 베끼고 기술을 구걸해 온 희한한 관계를 어떻게든 청산해야 한다.

한국이 일본을 더 배우고 연구해도 모자랄 판에 거꾸로 일본이 한국을 더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딱한 일이다.

이것을 역전시키는 첫걸음은 요즘 유행하는 투명성 제고다.

투명성 문제는 기업구조조정에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한.일관계에도 투명성 제고는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침략당한 과거사의 장부정리는 일단 일본의 양식에 맡겨두자. 그러나 미래를 위한 현재의 장부정리는 한국몫일 뿐더러 더 시급한 과제다.

체면 때문에 적자를 흑자로 둔갑시키는 분식 (粉飾) 결산과 허세들을 이젠 다 털어내야 한다.

우선 한국의 대차대조표부터 정직하게 만들어 보이면서 요구할 지원은 공생 (共生) 차원에서 당당하게 요구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일본보다 못한 것, 배워야 할 것에 대한 솔직한 리스트를 만들고 그것을 극복하는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인 시간표를 제시해 보자. 자존심 상하지만 그 길밖엔 없다.

현대판 친일파 (親日派)가 절실한 시점이다.

이장규 일본 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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