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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판, 징하요(1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13) 이념영화에 환멸

제목 탓일까. '짝코' 는 검열의 칼날을 비끼지 못한 채 짝짝이 영화가 되고 말았다.

영화의 실패이자 내 역사관 (歷史觀) 의 좌절이었다.

이후 10여년 동안 내 침묵은 계속됐다.

80년대의 군부독재시절은 무언의 침묵을 강요했고 이데올로기 논쟁은 지하로 숨었다.

하지만 역사는 민중의 힘으로 서서히 정도 (正道) 를 찾기 시작했다.

드디어 90년대초 나는 조정래씨의 '태백산맥' 을 영화화하기로 마음 먹었다.

당시 워낙 인기있던 베스트소설인데다 사회적으로 이념논쟁도 성숙됐다는 판단이 서서 나는 쉽게 이 작품을 결정했다.

태흥영화사는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1억원의 원작료를 작가에게 지불했다.

그러나 화창한 봄날을 맞기 위해선 꽃샘추위가 필요하듯 영화 '태백산맥' 도 액땜이 필요했다.

92년 6공 말기 안기부가 '시기상조론' 을 들고나오며 슬쩍 제작자를 통해 제동을 건 것이다.

그래서 '태백산맥' 은 한창 진행중이던 캐스팅 작업을 잠시 접어둔 채 '서편제' 이후 본격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다.

김영삼 태통령의 문민정부 첫해인 93년 10월 무렵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도 모든 게 변한 것은 아니었다.

태흥영화사를 통한 극우단체들의 압력은 여전했다.

"빨갱이 자식이 어떻게 이런 영화를 하냐" 는 식이었다.

지방 촬영중에서도 보이지 않은 압력은 계속됐다.

면직원이 나와 "무엇을 하냐" 꼬치꼬치 캐묻거나 심지어 경찰이 와서 로케이션 현장에 상주하는 경우도 있었다.

진보성향의 단체에서도 불만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좌익에 대한 시각이 객관적이지 못하다" 는 지적이었다.

영화가 완성된 후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원작자체를 지나치게 훼손했다는 견해를 펴기도 했다.

'짝코' 때도 그랬듯이, 나는 '태백산맥' 을 만들면서도 이념 그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인본주의를 지향했고, 그러다보니 이데올로기를 축으로 한 원작과 다른 부분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점을 놓고 원작자인 조정래씨와 갈등을 빚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나는 내 나름대로의 이런 역사인식을 영화 곳곳에 심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밤에는 빨치산에게, 낮에는 국군에서 협조해야 하는 마을 주민들의 애환과 쟁투 (爭鬪) .나는 이 선량한 양민들의 죽음을 씻김굿처럼 정갈히 씻어 줌으로써 망자 (亡者) 들을 위무 (慰撫) 하고 싶었다.

좌우도 아닌 철저한 민족주의자로서 완전히 각색된 김범우 (안성기) 의 입을 통해 나는 물었다.

"좌우 이데올로기에 집착해서 우리가 옹호해야할 진정한 이상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나는 애당초 원작이 너무 길다보니 '태백산맥' 을 1.2편으로 나눠 찍을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와서 솔직히 고백하건데, 촬영중 좌우의 극단적 시각 때문에 이 영화작업 자체에 '환멸' 같은 것을 느꼈다.

세계사의 변화에 비춰봐도 때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이런 후회스러움은 95년 베를린영화제때도 그랬다.

본선에 올라 모처럼 상도 바라보았지만,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이데올로기란 주제가 이미 구식이 돼 버렸다는 당혹감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히지만, 나는 앞으로 더이상 이념을 소재로한 영화는 만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태백산맥' 을 하면서 좋은 연기자 하나를 발굴했다.

주인공 염상구 역의 김갑수다.

중요한 배역이면서도 적당한 사람을 찾지 못하다 우연히 연극판에서 골랐다.

이처럼 어려울 때 좋은 사람을 만나는 걸 보면 "나는 운이 꽤 좋은 사람이다" 고 가끔 자문해 본다.

글= 임권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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