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 어디로] 중. 풀죽은 유럽, 기죽은 중남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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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파리 시내 16구에 사는 마르탱 (28) 은 경기가 좋아졌다는 프랑스 정부의 발표를 믿지 않는다.

8개월째 실업자인 그는 신문의 구인광고를 샅샅이 뒤지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국립직업소개소 (ANPE)에도 구직등록을 해 놓았다. 몇 군데 서류를 내고 면접도 봤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에 드는 자리다 싶으면 자기 차례까지 오지 않는다. 4개월 후면 실업수당도 끊긴다.

"작년 한해 동안 15만명의 고용이 신규창출됐다는 정부 발표가 피부에 와닿질 않아요. 나는 프랑스 사람이 아닌가 보죠?" 연초 유로 출범으로 기세 등등했던 유럽 경제가 한풀 꺾였다.

유로화는 출범 2개월 남짓 만에 10%가량 평가절하됐고 성장률이 둔화되면서 실업 문제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중남미는 브라질에서 불거진 경제 위기가 전 지역으로 확산, 세계 경제의 최대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 침체된 유럽 = 프랑스의 경우 지난해 2.5%였던 경제성장률이 올해 3%로 기대됐고, 사회당의 야심작인 '주 35시간 근로제' 도입으로 고용도 본격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었다.

하지만 몇 달 새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작년 4분기부터 시작된 경기 하강 곡선이 올라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특히 미국의 유례없는 호황으로 상대적인 박탈감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독일경제연구소는 유럽연합 (EU) 의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최근 2.8%에서 2.0%로 수정했다. 좌파 계열 정권의 득세에도 불구하고 EU 평균 실업률은 10%에서 좀처럼 내려오지 않고 있다. 오히려 지난해 10%대였던 독일의 실업률이 지난 1월 11.5%로 뛰어올라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다.

사회주의 노선을 고집해온 오스카 라퐁텐 전 독일 재무장관의 사임으로 경기가 호전될 단초가 마련됐다는 점에 유럽 경제계는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나 당분간 유럽은 미국의 호황 기조에 기대서 반전을 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란 전망이다.

◇ 위기의 중남미 = "빵을 살 돈이 없어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도 있어요. 이러다 무슨 일이 벌어지지나 않을지 불안해요. " 브라질 상파울루 인근 빈민가에서 월 1백달러 (12만원) 의 월급으로 세 아이를 키우고 있는 간호사 몬테리오의 한숨 섞인 푸념이다.

2개 병원에서 밤낮으로 일하지만 말 그대로 '밥벌이' 조차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파울루 시내 곳곳에 늘어서 있는 구직 행렬을 생각하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운이 좋은 셈" 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남미의 경제대국 브라질의 실업률이 15년만에 최대인 8%를 넘어섰다. 특히 상파울루의 실업률은 무려 20%에 이른다.

지난해 시작된 경제위기가 악화일로를 걸으며 각종 경제지표도 모조리 내리막길이다. 외국인 투자가들을 붙잡기 위해 변동환율제를 도입했지만 레알화는 오히려 35%나 폭락했다. 3~6%의 성장 감소도 감수해야 할 판이다.

브라질이 흔들리자 이웃 아르헨티나는 수출이 40%나 줄어 신음하고 있다. 석유 수출이 주 수입원인 베네수엘라는 저유가 때문에 심각한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50%가 넘는 인플레에 시달리던 에콰도르는 최근 은행을 폐쇄하는 등 극약 처방을 썼지만, 노동계가 강력 반발하며 시위에 나서 치안마저 불안해졌다. 현지 전문가들은 중남미 전체의 올해 인플레는 평균 13.5%로, 재정적자는 6백50억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지난 16일 파리에서 열린 미주개발은행 총회에 참석한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 (IMF) 총재는 "중남미 국가들은 금융위기에 자연 재해까지 겹쳐 엄청나게 어려운 한 해를 겪어야 할 것" 이라고 말했다.

파리 = 배명복 특파원,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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