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판, 징하요(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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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9) "왜 조선말 써"

나는 또래들보다 2년쯤 늦게 소학교 (지금의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장성읍내에 있는 월평소학교였다.

입학하기전 나는 아버지가 나가던 야학에서 한글을 배웠다.

말이 야학이지 배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낮에도 수업을 하기 일쑤였다.

한편으로는 서당도 다니면서 한문공부도 했다.

소학교 1학년 시절엔 꽤 으시대며 다녔던 것같다.

늦게 입학한 프리미엄이라고 할까. 학급에서 일본어 통역까지 했으니 인기가 꽤 괜찮은 편이었다.

1학년 1반에 들어가니 다카하시 (高橋) 라는 일본인 여선생이 담임을 맡았다.

우리 학교는 갓 사범학교를 졸업한 다카하시 선생에겐 첫 발령지인 셈이었다.

그러니 선생과 학생이 의사소통을 전혀 할 수 없었다.

이때 의사전달자로서 학생과 선생 사이의 가교 (架橋)가 된 게 바로 나였다.

입학전 야학에라도 다녔던 게 이때 소용있었다.

그곳에서 이것저것 주어들은 일본어 몇마디로 통역 비슷한 것을 할 수 있었으니. 그러나 일제는 어린 마음에도 많은 상처를 남겼다.

불신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당시 학교에는 '고쿠고초 (國語帳)' 라는 게 있었다.

선생의 도장이 찍힌 종이표였는데, 각자 20장씩 나눠주고 조선말을 쓰면 그 학생으로부터 한장씩 뺐는 거였다.

일종의 감시제도였는데 이걸 다 빼앗기면 성적에도 영향을 받았다.

소학교 때 공부 못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나도 성적은 좋은 편이었다.

모든 과목이 갑 (甲) 이었는데 '근로' 과목만 병 (丙) 이었다.

앞서 말한대로 전쟁말기라 일제의 수탈이 말 할 수없이 심했다.

우리들도 '다쿠앙' (단무지) 공장이나 뽕밥의 잡초 제거 등에 동원됐다.

몹시 병약했던 나는 이 근로 과목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해방되기 바로 전해이던가.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한 '사건' 의 피해자가 됐다.

어느날 뽕밭에 일을 나갔다가 나는 친구와 심하게 싸움을 하게 됐다.

싸우다 보면 감정이 격해 지는 것은 자명한 일. 그만 이성을 잃고 나는 그 친구에서 조선말로 욕을 뱉고 말았다.

그때 옆을 지나가던 일본 선생이 나를 불러 세우더니 "왜 조선말 쓰냐" 며 주먹으로 오지게 나를 내리쳤다.

얼마나 맞았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나서 해방이 되자 나는 우연한 기회에 그 선생의 정체를 알게 됐다.

그는 구니모토 (國本) 로 창씨개명한 조선인이었다.

당시 이씨들은 조선조 이씨 왕가의 후손들이란 의미에서 '나라의 근본' 이란 뜻의 구니모토로 성을 바꾸곤했다.

나는 그런 사실을 알고 분노가 치밀었다.

이후에도 얼마나 쓰린 상처로 남아있었던지 지난 78년에 만든 영화 '족보 (族譜)' 는 이 사건이 모티프가 됐다.

나는 월평국교 4학년을 다니던 중 근처에 있던 진원국교로 전학을 가 졸업할 때까지 다녔다.

고모 둘이 이 학교의 선생이었는데, 우리 집안에서 기부도 많이 해 학교 풍금에는 친척들의 이름이 박혀있었다.

나는 소학교에 입학하면서 난생 처음 아버지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딱딱한 야구공이었다.

여기엔 사연이 있다.

당시 우리 또래들은 일본말로 '하루' 라는 고무공치기 놀이를 즐겨했다.

말랑말랑해서 잘 튀는 공을 가지고 놀았는데, 일제가 싱가포르 함락기념품으로 학생들에게 나눠 준 것이었다.

하도 갖고 싶어서 아버지의 지갑에서 돈을 훔쳐 사려고 해도 팔지를 않았다.

나중에 그런 사실을 안 아버지는 그 공대신 딱딱한 야구공을 선물로 준 것이다.

글= 임권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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