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는 남미] 1. 룰라 "인기 잃더라도 경제는 살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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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부 낙관론'의 나라, 브라질. 골드먼삭스의 브릭스(BRICs) 보고서는 브라질을 중국.인도의 잠재력에 버금갈 나라로 꼽으면서도 "잘하면…"이란 단서를 달았다. 엄청난 잠재력을 구현해 보일 여러 가지 변화 조짐이 일고 있으나 아직 미해결 난제가 많다는 것이다. 과연 남미는 어떤 변화로 21세기를 열어 갈 것인지, 한국 경제에 남미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현지 취재를 7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 브라질 룰라 대통령이 지난달 14일(현지시간) 상파울루 삼성전자 휴대전화 공장에서 연설을 마친 뒤 직원들의 손을 잡아주고 있다. 상파울루=염태정 기자

상파울루의 삼성전자 휴대전화 공장 현지 여직원들 앞에 선 룰라 대통령은 차분한 목소리로 연설해 나갔다.

"여러분 공부하세요. 직장 다닌다고 공부를 중단하면 안됩니다. 브라질의 미래는 오로지 젊은 여러분이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룰라 대통령은 스무살 안팎의 젊은 여직원들에게 학교 선생님처럼 시종 공부 타령을 해댔다. 그리해야 일자리가 생기고 나라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환호가 터지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말 잘하고 잘생긴 얼굴에, 고생에 찌든 투사의 흔적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여론 조사에선 처음에 비해 인기가 많이 떨어졌다고 나타났으나 그의 대중적 인기는 여전했다.

▶ 수천명의 브라질 시민과 노동자가 지난달 16일 일자리 제공과 임금인상.금리인하 등을 요구하며 상파울루 시내 중심부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상파울루 AP=연합]

하지만 그런 룰라도 고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강력한 긴축정책으로 국제적 신용을 유지하고 물가안정을 도모하는 데 성공했으나 대내적으론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고 있었다. 집권 첫해 마이너스 경제성장에 실업률은 더 높아졌고 기존의 사회보장 혜택에 칼질까지 해대니 정치적 반대파는 물론 지지기반이었던 노조조차 선거공약은 어디 갔느냐며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룰라를 대통령으로 배출한 브라질 통일노조(CUT)는 여간 난처한 입장이 아니다. 한국의 민주노총에 비교되는 CUT는 조합원 2300만명으로 남미 최대.최강의 노동자 조직. 룰라 정책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루이스 마리노 위원장은 "룰라가 잘돼야 노조가 잘되는데…. 정부와 고용창출 프로그램을 마련 중"이라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대통령이 된 룰라가 자기들이 앞장서 비판했던 정책을 확확 펴나가고 있으니 체면이 말이 아닌 것이다. 마리노 위원장은 어쨌든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선 무엇이든지 해야 한다고 말했다. 단순한 노조위원장이 아니라 말하는 품새가 노동장관쯤 돼 보였다. 한국에선 연봉 5만달러 노동자들도 파업한다고 했더니 "그런 회사는 당장 브라질로 옮기라 해라"고 대꾸했다.

하지만 일자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하루 아침에 늘어날 수가 있나. 룰라는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임기 안에 최저임금을 두 배 인상하고 1000만개의 새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이게 어디 말처럼 쉽나 말이다. 수도 브라질리아의 정부종합청사 거리에는 부쩍 데모 행렬이 늘었다고 한다. 마침 재무장관을 인터뷰하러 가는 길에도 2㎞는 넘어보이는 붉은 깃발의 시위행렬이 "일자리를 달라"고 연호하고 있었다.

대선공약을 물고 늘어지는 게 이들뿐은 아니다. 또 하나의 지지세력이었던 무토지농민단체(MST)는 "어서 약속대로 땅을 달라"며 룰라를 압박한다. 한국의 한국노총 격인 포르사 신지컬의 공세는 한결 노골적이다. 제랄지노 산토스 부위원장을 만났더니 "룰라는 재선이 어려울 것"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기업 쪽이라고 해서 룰라를 두둔하는 것도 아니었다. 기업들은 기업들대로 돈을 풀고 금리를 낮추라는 것이었다. 일자리 창출은커녕 최근 실업률은 상파울루의 경우 다섯명 중 한명꼴로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대도시 치안은 또 얼마나 위험한가. 상파울루나 리우데자네이루의 경우 백주에 권총강도가 사방에서 출몰해 외국 관광객들이 전전긍긍해도 아무 대책이 없다. 이러고도 나라가 굴러가는 게 신기해 보였다. 브릭스 보고서가 브라질에 대해 "잘하면…"이라는 조건부 낙관론을 편 것도 이런 난관들의 개선을 전제로 한 낙관론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사면초가 속에서도 룰라 대통령이나 그의 중심 측근들은 용케 버티고 있었다. 안토니오 팔루치 재무장관은 "인기에 영합하는 정책은 결코 쓰지 않겠다"며 긴축의지를 분명히 밝히는가 하면, 엔리케 메이렐리스 중앙은행 총재도 "악성 인플레를 떨치고 연 6,7% 성장하는 경제토대를 만들려면 지금의 고통을 참고 견뎌야 한다"고 했다. 사실 재무장관이나 중앙은행 총재의 이 같은 단호한 태도는 뜻밖이었다. 아, 이래서 월스트리트가 브라질의 룰라 정부에 후한 점수를 주게 된 거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사실 룰라의 정책은 크게 봐서 전임자 카르도주의 답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그것이 예상을 뒤엎은 것이었고, 주목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전임자의 비인기 정책을 공격해 대통령이 된 인물이 한술 더 떠 강도 높게 비인기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으니 말이다.

벌써 룰라 정책의 성패를 가늠하긴 이르다. 다만 이런 정책을 펴나가는 룰라 대통령의 정치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 다시 말해 리더십이 어느 정도 먹혀들고 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이 주목하고 있다. 심지어 아르헨티나의 한 지식인이 "브라질에 부러운 게 하나 있다면 최근 룰라가 보여주고 있는 리더십이다. 아르헨티나에 그런 지도자가 없다"고 했다.

그는 더 이상 노조 지도자가 아니었다. 불가능한 대선 공약들은 아예 터놓고 못 지키겠다 해버렸고, 필요한 개혁을 위해서는 원수졌던 정적들을 능숙하게 끌어안는 프로정치인이 돼 버렸다. 누가 됐든 간에 강력한 리더가 매우 절실한 브라질로서는 최근 정치지도자 중 가장 카리스마를 발휘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룰라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기대를 모으고 있는 것이다.

상파울루.브라질리아.마나우스=이장규 경제전문 대기자, 염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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