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뷰] 스필버그 신작 '터미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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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휴머니티(인류애) 자극' 이라는 주특기를 다시 한번 발휘했다. 타인에 대한 공감과 배려, 그리고 우정의 존귀함을 영상으로 표현하는 그의 천재성이 빛나는 새 영화 '터미널' 이야기다.

그동안 그가 휴머니티를 드러낸 공간은 주로 전쟁터('태양의 제국''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학살 현장('쉰들러 리스트') 등 인간성이 극도로 도전받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공항이다. 세계에서 가장 번잡하다는 미국 뉴욕의 JFK공항. 그곳에 빅토르 나보스키(톰 행크스 분)라는 동유럽의 40대 남자가 도착한다. 여행지에 대한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던 그는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지 못한다. 미국으로 날아오는 동안 그의 나라 크라코지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정부가 없어졌고, 그 바람에 미국 땅에 발을 들여놓지도,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입장에 놓였다.

스필버그의 영화 'ET'에서의 외계인 신세나 다름없게 된 나보스키는 크라코지아의 상황이 정리되기를 기다리며 공항 터미널에 머물게 된다. 영화는 이때부터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나보스키는 화를 내거나 절망하지 않고 침착하게 생존 방법을 찾아간다. 공항 손수레에 들어있는 보관용 동전을 모아 끼니를 해결하고, 책과 TV를 보며 영어를 배운다. 터미널 내의 공사장에 임시 숙소를 마련하고, 공사장 잡역부로 취직도 한다. 그러면서 청소부와 화물운반원 등을 친구로 사귀고 그들의 문제까지 해결해준다. 언어와 피부색을 초월한 스필버그식 우정이 표현되는 장면이다.

나보스키는 그를 공항에서 쫓아내 불법 체류자로 만드려는 공항 관리국 책임자의 지능적인 술수에도 말리지 않는다. 너무 순수해 잔꾀가 통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순박하고 성실한 모습으로 공항 사람들의 신뢰를 얻고 당당한 터줏대감으로 자리를 잡는다. 게다가 미녀 승무원 아멜리아(캐서린 제타 존스 분)의 마음을 사로잡아 사랑을 싹 틔우기도 한다. '포레스트 검프'와 '캐스트 어웨이'에서 절망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는 인간의 힘을 보여준 톰 행크스가 여기서도 같은 색의 연기를 펼친다.

나보스키가 공항 터미널에서 9개월 동안 산다는 설정은 비현실적으로 보일 만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입국 서류를 분실해 파리 드골공항에서 1988년부터 11년 동안 살았던 이란인 메르한 카리미 나세리의 실화를 모티브로 삼았다. 그는 '알프레드'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터미널 인생'을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영화는 1700평의 땅에 200여명을 동원해 만든 진짜 공항보다 더 공항 같은 세트장으로도 화제가 됐으며, 다음달 1일 열리는 베니스 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27일 개봉, 전체 관람가.

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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