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오리型 대통령'은 어떨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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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필자는 1992년 12월 어느날 대통령선거에 나섰던 김영삼 (金泳三) 후보와 김대중 (金大中) 후보를 한 장소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대통령후보를 차례로 초빙한 어떤 강연회에서 두 후보의 일행들이 연출하는 행렬의 모습을 보고 묘한 대비를 발견한 적이 있다.

김영삼후보 일행이 당도했다는 소리가 들리면서 좌중이 술렁대기 시작했는데 후보자는 보이지 않고 수행원들과 학회 참석자들이 뒤엉켜 수인사하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한참 지난 뒤에야 김영삼후보가 참석자 사이를 돌며 악수하는 것이 보였다.누가 수행원이고 누가 후보인지 식별이 잘 되지 않았다.

나는 "김영삼후보는 매우 자유분방한 스타일을 좋아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김대중후보 일행은 아주 대조적이었다.

김대중후보가 맨앞에 서고 수행원들은 후방의 양쪽에서 질서정연하게 안행 (雁行) 하고 있었다.

말을 건네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묵묵히 후보자를 따라가는 모습이 경건할 정도였다.

순간적으로 내 입에선 탄성이 나왔다.

전날의 김영삼후보 행렬은 오리들이 무리지어 돌아다니는 모습을 닮았다고 하면 김대중후보의 행렬은 기러기의 행렬과 같지 않은가!

그후 김영삼후보가 대통령이 돼 직무를 수행하는 스타일이 보기와는 딴판으로 독선적이라는 현실에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 시점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보며 이번에는 필자의 즉흥적 관찰이 빗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국민의 정부 1주년을 맞이해 '국민과의 대화' 도, 기자회견도, 국제회의도 끝났다.

그간의 업적에 대해서도 평가가 내려졌다.

사람들은 대체로 위기탈출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노고를 치하하지만 여전히 불안감이 가시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경제로 말하자면 청신호를 보내는 경제지표와 체감경제 사이의 괴리를 들 수 있지만 정치적 불안은 무엇인가? 대통령의 선의만 믿고 있기에는 지금까지의 정국운영이 너무나 절망적이다.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다.

경제의 발목을 잡는 정치를 개혁하겠다는 의지나 인위적 정계개편을 않고 야당을 국정의 동반자로서 존경하겠다는 선한 의지의 표명을 환영하면서도 이를 뒷받침하는 개혁의 내용과 일정이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국민의 정부 1년을 평가한다면 낙제점이다.

이같이 성적이 부실한 이유는 국민의 정부가 권력 재창출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으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 정책연합을 모색하기 보다는 포퓰리즘 (populism) 적 권력구사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총리인준 거부가 의원 빼가기를 낳았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그 이후의 정국 전개가 총리인준 거부의 필연적 결과라고 할 수는 없다.

세풍.총풍 등으로 대변되는 사정 정국이 급기야는 소위 '검란 (檢亂)' 으로 이어지고 의정단상 격돌, 방탄국회, 반쪽국회, 반쪽청문회, 국회사무실 난입, 장외투쟁, 도청, 고문, 사직동 특별사찰로 점철된 정치판에 권노갑 (權魯甲) 씨가 돌아왔다.

이런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주화의 작은 씨앗이라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인가.

무슨 원칙은 있는가.

지난해 여름부터 말하던 정치개혁 입법은 그나마 이빨 빠진 채 개혁의 동기도 의심스런 상태에서 잠들어 있고 정치인들은 벌써 내년 총선 기운에 마취되고 있다.

포퓰리즘은 대화와 설득에 탁월한 대통령을 가지고 있는 집권당에는 매우 유리한 전술이고 유혹을 느낄 만하지만 민주화에는 도움이 안된다.

정부 홍보라면 몰라도 복잡다단한 국정문제를 놓고 산발적 질문에 대해 일방적 답변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직접민주주의라는 화려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가식적이다.

또한 국민의 정부가 개혁정치를 주장하며 사용하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평등의 상징은 책임.질서.업적이라는 보편적 사회가치를 경시하게 하여 사회의 기강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뜨릴 수 있다.

국민연금.한일어업협정.의약분업문제 등에서 보이는 행정의 난맥상, 노사정의 삐걱거림, 내각제를 둘러싼 공동정권의 불협화음 - 이 모두가 순탄치 않은 앞날을 예고하고 있다.

대통령이 불호령을 내린다고 행정의 난맥이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상하가 숨김없고 부담없이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결정이 내려져야 한다.

개혁을 부르짖는 나만이 옳다는 오만도 버려야 하고 과도한 포퓰리즘도 절제해야 한다.

위기탈출에 기러기형 리더십이 불가피했다고 한다면 앞으로 남은 4년 동안 '오리형 리더십' 을 간절히 기대해 본다.

趙重斌 국민대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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