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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석학.정치지도자에게 듣는다] 2.펠리페 곤살레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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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 안녕하십니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기회를 주셔서 오히려 고맙습니다. "

- 먼저 지난 96년 총리직을 물러나신 이후 근황은.

"프로그레소 글로발 (세계 진보) 이라는 재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새로운 사상을 개발하는 일이죠. "

- 스페인의 민주화에 많은 공헌을 하셨는데, 현재의 민주화 수준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민주주의 가치와 관행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스페인은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앞으로의 문제는 민주주의 안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것입니다. "

- 한국에서의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는데 필요한 조언을 한다면.

"합의된 영역에 대해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민주적 공생이 공고해집니다. 다양한 의견과 여러 대안이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국가 정체성에 필요한 요소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서는 미래사회에서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

- 82년 총리가 됐을 때 스페인은 심각한 경기침체를 겪고 있었습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어떤 정책을 폈습니까.

"70년대 중반 오일 쇼크에 따른 유가폭등으로 당시 위기가 심각했죠. 스페인은 국내 경제를 보호하는 폐쇄 경제체제였기 때문에 경쟁력을 잃어버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외 경쟁에 문호를 개방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 산업 구조조정과 경제개방, 그리고 개방 측면에서 본 현대화를 동시에 추진해야 했습니다. 경제 자유화가 반드시 사회정책과 병행함으로써 국민을 응집시키고 유대감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정부가 추진한 정책의 요체입니다. 경제 자유화가 사회통합을 해쳐 사회적 유대감을 떨어뜨린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

- 구조조정의 결과는.

"스페인 기업이 현대화됐고 스페인 자체도 현대화되고 있습니다. 82년 집권했을 때 1인당 국민소득은 약 4천5백달러였지만 제가 물러날 때는 약 1만4천5백달러로 늘었습니다. "

- 그 과정에서 국제통화기금 (IMF) 으로부터의 권고를 얼마나 수용하셨습니까.

"IMF는 각국의 거시경제적 상황변화를 통제하는 의무를 갖고 있지만 그 처방에 대해선 비판도 적지 않습니다. IMF는 보다 유연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 다른 상황에 동일한 처방을 내릴 수는 없는 겁니다. 스페인에 대해서도 같은 사항을 권고했습니다. '경제를 개방하라, 재정을 긴축 운영하라, 건전한 거시경제를 유지하라, 적자를 내지 말라, 인플레를 억제하라' 고 요구했죠. 지금이나 80년대나 IMF의 요구는 같습니다. 제가 배운 것은 위기상황에서 건전한 거시경제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변국가들은 건전한 거시경제 유지 이상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만 중심국가들은 대가를 지불함이 없이 오히려 신용상의 이득을 얻고 있습니다. "

- 주변국가들이 치러야 하는 대가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뭡니까.

"한국은 과거 25년간의 경제발전 과정을 볼 때 매우 성공적인 국가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브라질.아르헨티나.칠레와 같은 나라는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심각한 자본유출, 경제성장의 저하, 실업증가 등의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이들 국가는 90년대 내내 일련의 구조개혁과 함께 강력하고 진지한 거시경제적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러나 달러나 유로화와 같은 기축통화와 비교해 신인도가 낮기 때문에 혼란기에는 단기성 핫머니가 신인도 높은 국가로 빠져나갔습니다. 아시아 국가들은 최근 수년간 신인도를 제고해왔습니다.

이들이 우둔했다는 비난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소화할 수 있는 이상으로 돈을 빌려주지 말거나 그 나라처럼 동화되는 상황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는 말이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난은 돈을 빌리는 쪽만 아니라, 돈을 빌려주는 쪽에 대해서도 할 수 있습니다. "

- 한국은 모든 부문에서 개혁을 진행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스페인도 개혁과정에서 반발이 적지 않았을텐데요.

"개혁은 결코 쉽게 이뤄지지 않습니다. 구조개혁을 단행할 때 제일 신기한 것은 피해를 볼 것이라고 예상하는 쪽은 반발하지만 수혜를 보는 쪽은 결코 충분한 지지를 보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수혜를 입는 쪽, 이른바 잘 나가는 우수한 기업들은 개혁의 덕을 본다기보다 자신들이 잘 해 수혜를 본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일반 국민의 보통 심리입니다. 문제는 생존법을 배우는 것인데, 이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기술혁명과 새로운 흐름이 너무 빠르기 때문입니다. 기술변혁은 지속적으로 우리의 적응을 요구할 것입니다.

따라서 개혁은 계속될 수밖에 없으며, 개혁을 위해서는 사회구성원 대다수가 참여하는 장기적 합의가 필요합니다. "

- 개혁정책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지지를 잃어 정권을 빼앗긴 이유는.

"정치가가 사회현실을 변화시켜서 성공을 거두고 다른 상황에 처해 새로운 계획을 수행해 나가면 이상하게도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민주주의에서 선거로 패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자신이 변화시킨 사회가 이전과 같은 추진력에 부응하리라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물론 실책도 있었습니다. 부패가 만연했다는 이미지가 생겨났습니다. 부패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만연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패가 만연했다는 비난이 일면 일반시민은 모두가 부패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

- 한국의 경우 실업이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스페인도 고실업을 겪고 있는데, 어떤 조치가 필요할까요.

"실업에는 두 가지 기본적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조적인 것입니다.

정보화는 빠른 속도로 생산성을 배가시킵니다. 더 적은 인력으로 같은 양의 생산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실업은 앞으로도 심각할 것입니다. 두번째로 '고용주 없이 고용을 말할 수 없다' 는 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일자리를 줄 수 있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고용은 있는 것을 재분배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필요성을 창출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입니다.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내는 기업가들을 지원해야 합니다. "

- 재임기간 중 노동계를 설득하면서 지속적으로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셨습니다. 노.사.정간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은.

"근로자들은 자신의 이해관계가 이익분배에만 있지 않고 어떻게 세계경쟁에서 기업이 성공적으로 생존하느냐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기업이 망하면 기업가는 자본의 상당 부분을 잃을 수 있지만 근로자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게 됩니다. 따라서 경쟁력을 갖춘 성공적인 기업의 이익은 곧 노사 모두의 것입니다. 모순된 이해관계는 대결보다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해결됩니다. 대결은 기업경쟁력을 심각한 위험에 빠뜨릴 뿐입니다. "

- 국가나 정부의 역할은 어떠해야 할까요.

"정부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정부는 특정집단의 이익을 대변해서는 안됩니다. 정부가 기업이나 노조, 또는 다른 압력단체의 이익을 대변한다면 정통성을 잃게 됩니다. 요즘 국가나 정부의 기능을 탈규제.자유방임으로 보는 추세입니다만 이는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모든 사안에 개입하는 비대한 국가를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정력이 없는 무력한 정부도 곤란합니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국민의 보건과 같은 국가의 기능을 시장에 맡길 수는 없습니다.

국가나 정부차원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훌륭한 인재를 길러내는 것입니다.

훌륭한 인적 자원이 없다면 21세기의 경제전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

- 마지막으로 한국을 처음 방문하시는 소감은.

"오래전 저는 빌리 브란트 독일총리와 함께 한 한국인을 변호하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만난 적은 없지만 이제 그분이 대통령이 돼 정부를 이끌고 또 저를 초청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한국은 매우 성공적인 산업화를 이뤘습니다. 한국의 경험을 직접 현장에서 확인하고 싶습니다. 위기를 겪을 때 낙관론자가 돼야 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만 한국은 낙관적으로 볼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적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 숙련된 노동력이라는 인적자원이 풍부한 국가이니까요. "

- 귀중한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만난사람 = 김원호 대외경제정책연 연구원

정리 =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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